저의 장례 미사 강론은 요즘 대체로 ‘고인이 먼저 가신 그곳으로
우리도 따라가자.’입니다. 고인을 사랑한다면 말입니다.
이것은 주님 승천 대축일의 본 기도와 감사송의 내용 그대로지요.
“성자 그리스도의 승천으로 저희를 들어 높이셨으니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럽게 올라가신 하늘나라에 그 지체인 저희의 희망을 두게 하소서.”
“주 예수님께서 저희 머리요 으뜸으로 앞서가심은
비천한 인간의 신분을 떠나시려 함이 아니라
당신 지체인 저희도 희망을 안고 뒤따르게 하심이옵니다.”
주님께서 먼저 올라가신 하느님 나라가 제자인 우리가
언젠가 따라가야 할 곳이고 그때까지 우리의 희망을 둬야 할 곳이라는 것이
승천 대축일의 의미이고 장례 미사 때 우리가 기념하는 의미이지요.
그런데 이 의미는 진작 알았던 바이지만, 전엔 이 의미가 관념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 관념이 실제로 바뀌기 시작했지요.
아니, 막연하고 흐릿하던 것이 점차 또렷하게 되고,
멀리 있다고 생각되던 것이 아주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한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저의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하늘로 가시는 바람에
제가 가야 할 곳이 어디인지 확실히 또렷해졌고,
그 후 제가 사랑하고 저를 사랑해주던 분들이 떠나가자 더욱 굳어졌습니다.
우리는 살아서건 죽어서건 사랑하는 사람을 따라갑니다.
그러므로 따라가지 않는다면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긴 하지만 오늘 두 번째 독서와 본 기도는
주님께서 올라가신 하늘로 우리가 따라가야 할
더 거역할 수 없는 근본적인 이유를 얘기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여러 차례 그리스도 신비체론을 얘기했지요.
그것은 주님과 우리가 한 몸이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주님은 그 몸의 머리이며
우리는 그 지체들이라는 얘기 말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이 신비체론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이기도 합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 주님은 당신은 포도나무이고 우리는 그 가지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러므로 ‘나는 나다’라며 잘리거나 떨어져 나가는 가지만 아니면 됩니다.
아이는 껌딱지처럼 붙어 엄마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자기가 갈 곳이 따로 있지 않고 엄마가 가는 곳이 자기가 갈 곳이듯
우리에겐 떼려야 뗄 수 없는 한 몸이라는 강한 일체감이 있어야겠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 스스로 하늘로 오르려고 애쓸 필요가 없고,
그러므로 우리 스스로 하늘로 오를 수 있는 힘이 없어도 됩니다.
달나라에 갈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기 위해서는
엄청난 에너지를 가진 발사체가 있어야 하지만
우리가 하늘로 오르기 위해서는 그런 힘을 지닌 발사체가 없어도 됩니다.
하늘로 오르시는 주님께서 우리의 위성이요 발사체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