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나는 성령께 사로잡혀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습니다.
다만 투옥과 환난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성령께서 일러 주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달릴 길을 다 달려 주 예수님께 받은 직무, 곧 하느님 은총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다 마칠 수만 있다면, 내 목숨이야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밀레토스에서 에페소 원로들과 헤어지며
자신이 어떻게 해왔는지 회고한 다음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내다봅니다.
제자들을 떠나시며 주님께서 고별사를 하시는 것처럼, 그도 고별사를 하는 겁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는 오늘 “달릴 길”을 다 달리는 것에 대해 얘기하는데
디모테오 후서에서도 이 “달릴 길”을 다 달리는 것에 대해 얘기합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래서 저도 이 “달릴 길”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바오로의 달릴 길과 저의 달릴 길은 다를까요? 아니면 같을까요?
나는 나의 달릴 길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지금까지 달려왔을까?
나의 달릴 길이 뭔지 생각지 않고 무작정 달려온 것은 아닐까?
성찰해보니 나의 달릴 길이 무엇인지 전혀 생각지 않았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인생의 목표를 고민한 바가 있고,
그 고민 끝에 행복이 내 인생의 목표인 줄 깨달았으며,
그 행복의 길을 향해 줄곧 달려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차츰 이 세상에서의 행복의 길을 넘어 저세상에 이르기까지의
구원의 길을 줄곧 생각하고 그 길을 달려왔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을 하긴 하지만, 왠지 제 말에 힘이 없습니다.
적어도 바오로 사도만큼의 확신이 없습니다.
“달릴 길”이 아니라 “나의 길”을 많이 달렸기 때문일까요?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 말에 자신이 없는 것은
나의 길을 달린 측면과 열심히 달리지 않은 두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선 저는 달릴 길을 달리다가 옆길이랄까 샛길이랄까
이런 나의 길을 달리다가 다시 돌아와 달릴 길을 달리곤 했습니다.
제가 달릴 길은 바오로 사도가 달린 것처럼
주님의 길을 달려야 하고, 주님께서 가라고 하신 길을 달려야 하는데
저는 제 행복의 길, 아니 제가 행복의 길이라고 생각한 길을 달리곤 한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성령께 사로잡혀서 또는 성령께서 일러주셔서 길을 가고,
그렇게 간 길은 하느님의 은총의 복음을 전하러 가는 길이요.
그러기에 대부분이 투옥과 환난이 기다리는 그런 길이었는데
저는 흉내는 냈지만, 대부분 행복의 길, 꽃길을 가려고 했습니다.
이것이 제 평생의 열등감이요 패배감입니다.
성령께 사로잡히지 못한 자의 인생이고,
그렇게 인생길을 갔기에 열심치 못했고
혹 열심히 달렸어도 달릴 길을 다 달렸다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애는 애대로 썼으면서도,
크게 잘못된 길을 간 것 같지 않으면서도.
나는 과연 성령께 사로잡힌 것일까?
그렇지 않은 것일까?
바오로 사도를 보며 나를 돌아보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