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서
우리 삶의 목표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종교적 관점이든 아니든,
카톨릭의 관점이든 불교의 관점이든
우리가 인간이라는 점에서 각자의 목표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나만을 위한 욕심이든,
우리 모두를 위한 생각이든
인간은 좋음을 추구합니다.
무엇이 좋은지에 대해서는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그 생각의 범위는 생각보다 이해하지 못할정도로
넓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좋음을 추구한다는 말이 너무 추상적으로 들려서
피부에 와 닿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다른 말로 바꾸자면
편안함을 추구하고,
맛있는 것을 원하며
여유를 즐기고 싶어합니다.
먼 거리를 걸어가기 힘들기에 차를 이용하고
내가 원하는 것을 언제든지 손쉽게
사서 먹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좋음을 얻는 것에는
하나의 특징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를 둘러싼
자연에서 온다는 점입니다.
우리의 식량에서부터 시작해서
우리가 사용하는 전기, 기름까지
어느 것 하나 자연에서 오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즉 우리 삶은 자연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이용이라는 단어로 연결됩니다.
하지만 인간은 자연을 이용하는 법을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달라고 요청하면
언제든지, 얼마든지 자연이 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자연에게 요구합니다.
자연은 그 요구가 벅차면서도
힘겹게 그 요구를 들어주었고
그러면 그럴수록 인간은 '조금 더'를 외쳤습니다.
자연이 베풀어주는 호의를 권리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그 요구는 착취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창세기와 마찬가지로 요한복음은
창조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초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창세기의 첫 번째 창조 이야기처럼 요한복음도
모든 것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음을
이야기합니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이 두 문장은 서로 다르게 표현되었지만
결국 같은 것,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에게서 왔음을
이야기합니다.
같은 내용을 다르게 표현하면서
반복을 통해서 복음은 그 내용을 강조합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이라는 점에서
인간과 자연은 같은 위치에 서 있습니다.
물론 인간과 자연이 같은 위치에 있다는 표현은
온전히 받아들이기 쉽지 않습니다.
창세기는
인간만이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점에서 인간은 다른 피조물과 다릅니다.
그러나 다르다는 것을
꼭 우위로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창조를
인간이 다른 피조물보다 높다는 의미로 해석하면서
인간은 자연의 호의를 권리로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요한복음이 지양하는 모습 가운데 하나입니다.
요한복음은 죄를 이야기하면서
계명과 연결시키기보다는
하느님과의 관계성과 연결시킵니다.
예를 들면
요한복음 9장에서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거기에서 바리사이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는 예수님을 죄인이라고 부릅니다.
반면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잘 안다고 말하면서
예수님을 거부하는 바리사이들에게
죄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하느님을 거부하는 것을
요한복음은 죄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을 갖지 않는 것을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신앙인이라고 말하면서
하느님을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인간은 자신이 다른 피조물보다
높은 자리에 있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그 생각은 자칫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높이 올라갑니다.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을 것 같고
모든 것이 다 허락된 것처럼 생각합니다.
인간은 한계를 뛰어넘고 싶습니다.
한계가 없는 존재는
신과 같은 존재이며
그렇게 우리는 하느님의 자리에 서고 싶어합니다.
내가 하느님이 되는 순간
나는 더 이상 하느님이 필요없습니다.
즉 자연을 우리의 형제자매로 생각하지 않고
인간이 자연보다 높다고 생각하면
그 결과는
하느님을 거부하는 죄로 연결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심판은
하느님께서 하시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나타납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빛을 비추어 주십니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그 빛은
그 빛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도
거부하는 사람에게도 다가갑니다.
그 빛은 요한복음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생명과도 같은 의미로 사용됩니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즉 하느님을 거부하는 것은
빛을 거부하는 것이며
스스로 생명이 아닌 죽음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심판을 통해
벌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죽음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실로 인간은
자연을 형제자매로 생각하지 않으면서
스스로 어둠 속으로 걸어가고 있습니다.
우리 사부 성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을 찬미하면서
그 찬미에 모든 피조물을 초대했습니다.
우리 모두가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에게서 나왔기에
서로 형제자매로서 손을 맞잡고
하느님을 찬미하자고 초대했습니다.
우리가 지금의 어려움을 딛고 일어나기 위해서는
형제성의 회복이 필요합니다.
물론 그 형제성은
각 피조물의 고유함을 인정하는 방식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사람은 사람으로서
식물은 식물로서
동물은 동물로서
서로 다릅니다.
서로 다르기에 우리는 서로 만날 수 있고
일치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일치의 모델로 삼위일체 하느님을 보여주십니다.
성부 성자 성령이 서로 다른 위격이시며
서로 다르시면서 한 분 하느님으로 계십니다.
즉 일치와 다양성이 공존합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일치도
다양성을 바탕으로 합니다.
내가 옳고 네가 틀린 것이 아니라
나도 옳고 너도 옳으며
그렇게 서로 다릅니다.
그리고 그 다름을 전제로
우리는 하나를 향해 나아갑니다.
더 나아가 인간과 다른 피조물이 서로 다르지만
하느님의 창조물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서로를 바라볼 수 있고
착취의 대상이 아닌
공존의 대상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좋음을 추구합니다.
그 길에서 자연과 함께
그 좋음을 추구한다면
우리의 좋음은 더 풍요로워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