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아브라함의 이사악 봉헌을 말리는 천사(Sacrifice of Isaac, 1636)
크 기 : 캠퍼스 유채, 195X132cm
소재지 : 독일 뮌헨 고전 미술관(Alte Pinakothek)
구약 성서에 등장하고 있는 많은 인물 중 아브라함은 독보적인 존재에 속한다.
그는 크리스천들에 있어 믿음의 아버지이며 또한 유대교 이슬람교에서도 여러 다른 관점에서 신앙의 원조로 여기고 있는 특별한 인물이다.
아브라함은 인간적인 면에서는 약점도 있는 사람이었으나 하느님의 뜻에 외골수로 순종했기에 신앙의 모델로 칭송받는 것은 여러 불완전성을 타고난 우리에게 큰 위안을 주는 것이다.
창세기 20장에 나타나는 아브라함은 믿음의 원조라는 말이 무색한 비굴성이 드러나고 있다
그가 네겝 땅으로 가서 지낼 때 자기 아내 사라를 아내가 아닌 누이로 속이고 살다가 그곳 왕 아비멜렉이 사라의 미모에 반해 사라를 첩으로 취할 때 하느님의 안배로 이것을 벗어나게 된다.
사라를 아내로 취하려고 했던 왕이 하느님의 엄포를 듣고 너무 놀라 누이라고 속인 아브라함에게 따지자 아브라함은 다음과 같은 비굴한 변명을 하게 된다.
아브라함이 대답하였다. “‘이곳에는 하느님에 대한 경외심이라고는 도무지 없어서,
사람들이 내 아내 때문에 나를 죽일 것이다.’ 하고 내가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창세 20,11)
이처럼 신앙의 모델은 인간적인 수준에서 완벽성의 관점으로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그가 순수하고 우직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뜻에 노력하는가에 달린 것이다.
그는 하느님이 부르실 당시 아쉬운 것이 없는 살만한 처지였다.
재산도 여유 있고 작은 부족이나마 우두머리 처지인 데다, 아내 사라 역시 사랑스러운 처지이기에 아쉬움이 없었으나, 그는 다음과 같은 하느님의 아브라함의 처지에서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명령에 아무 조건 없이 전폭적인 순종을 하게 된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창세 12,1ㄴ)
오늘날 수도 생활을 시작하는 수도자들은 자기 가족을 떠나야 한다는 것에 대한 깊은 애착으로 수도 생활을 선 듯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간혹 있는데 유목민인 아브라함에게 있어 이 말은 너무도 이해할 수 없이 가혹한 것이었다.
자기 삶에 가장 중요한 것, 필요한 것을 포기하라는 명령이다.
농경민족은 농지를 중심으로 가족과 친척이 모이고 또 살만해지면 자기 가족과 재산을 지킬 수 있는 성을 만들 수 있으나 항상 떠돌아다녀야 하는 유목민들은 어떤 방어막도 없기에 믿을 수 있는 것은 가족과 친척뿐이며 따라서 이들의 가족 유대는 너무 대단하다.
이런 아브람에게 하느님은 자기 삶에 가장 확실한 것을 버리고 미래가 불투명한 미지의 땅으로 가라고 명령했으나 아브라함은 하느님에 대한 신뢰로 모든 것을 버리면서 새로운 것을 찾는 여정을 시작했다.
하느님께서는 이런 아브람에게 엄청난 축복을 주셨으나 그중에 첫째가 후손을 보지 못하는 아브라함에게 늘그막에 아들 이사악을 주신 것이다.
성서는 이때 아브라함의 나이를 백 세였다고 하니 한마디로 대단한 놀라운 축복에 속하는 것이다.
이렇게 승승장구의 행복한 인생을 살고 있던 아브라함에게 하느님께서는 도저히 이유를 알 수 없는 청천벽력과 같은 명령을 내리는데, 바로 자기 후사를 이을 이사악을 하느님께 봉헌하라는 것이었다.
창세기의 이 말씀이 이 작품과 관계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 “아브라함아!” 하고 부르시자,
그가 “예,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모리야 땅으로 가거라.
그곳, 내가 너에게 일러 주는 산에서 그를 나에게 번제물로 바쳐라.” (창세 22,1-2)
아브라함은 다른 것은 다 해도 그것만은 도저히 할 수 없다는 거부의 몸짓을 보일 수 있었으나 그는 극심한 갈등 속에서도 하느님의 명령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하고 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봉헌의 장소였던 모리와 산으로 오르는 것이 오늘 내용이다.
당시 이스라엘에는 자기들의 지은 죄를 용서받기 위해선 양이나 염소나 같은 재물을 바치는 예식이 있었으며 이교도 중에는 심지어 인신 공양의 풍속이 있긴 했으나 아브라함에게는 이것은 너무 괴로운 것이며 충격적이었다.
이 작품은 바로 아브라함이 모리와 산으로 가서 자기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려는 순간의 극적인 모습이다.
모리아 산은 지상에서 찾을 수 있는 어떤 장소가 아니다,
또한 신화적인 공간도 아니고 하느님의 뜻을 찾고자 하는 크리스천들이 각자의 삶에서 발견할 수 있는 신앙의 공간이다.
하느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찾고 발견할 수 있는 장소는 나에게 있어 모리아 산이며 이것은 신앙의 삶에서 너무도 중요한 본질적인 수행이나 구도의 목표라고 볼 수 있다.
그림에 보면 아브라함은 극도의 혼란에 빠진 노인의 모습이다
하느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작정하고 무조건 올라온 산이지만 막상 아들 이사악의 살해할 마음으로 아들의 목을 움켜잡았을 때 그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사악을 바치기 위해 칼을 든 아브라함의 손을 황급히 낚아챈 천사에 의해 아브라함을 칼을 떨어뜨리고 놀라 자기 행동을 막은 천사를 바라보고 있다.
아브라함의 늙은 얼굴은 일생을 살아가면서 여러 어려운 일들, 당황할 일들도 많이 겪은 그로서도 처음 바라본 너무도 놀라운 충격을 표현하기에 참으로 미묘한 모습인데, 한 인간의 어려움이 축적되었을 때 드러나는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게 하는 모습이다.
반면 아브라함이 제물로 바치고자 하는 이사악은 너무도 맑고 깨끗한 영혼의 젊은이였다.
하느님의 큰 섭리로 태어난 그의 영혼을 드러내는 듯 그의 모습 역시 만고풍상을 겪은 아버지 아브라함이나 놀란 표정의 천사와도 비길 수 없는 너무 깨끗한 모습이다.
전승에 의하면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안배로 이사악을 얻었을 때 나이가 백 세이며 이사악을 바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가 25년 후라 하였으니 이때 이사악의 나이는 약 25세의 청년이었기에 늙은 아버지를 완력으로서는 능히 이길 수 있는 처지였으나 그 역시 너무도 가슴이 아픈 상태에서 하느님의 명령을 받아들여 자기를 죽이려는 아버지처럼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모습이다.
그러기에 아브라함에게 항거하는 모습이 아닌 너무도 평화롭게 받아들이는 이 모습에서 아들과 아버지 모두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인다.
작가는 여기에서 아브라함의 탁월한 신앙만을 설명하는 게 아니라 이 신앙의 아름다움은 아들 이사악을 통해서도 드러남을 알리고 있다.
성서는 이 봉헌의 장면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그러고 나서 아브라함은 번제물을 사를 장작을 가져다 아들 이사악에게 지우고,
자기는 손에 불과 칼을 들었다. 그렇게 둘은 함께 걸어갔다. (창세 22,6)
세상의 관점에서 이런 내용의 전개라면 믿음이 강한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아들 이사악을 살해라는 과정에서 이사악은 생존 본능에 의해 극심한 반항을 하고 이때 아들의 완력에 의해 늙은 아버지의 시도가 실패할 수도 있다는 게 통념적인 전개지만 여기선 전혀 반대이다.
아들 이사악 역시 아버지 아브라함의 신앙적 결단을 받아들여 기꺼이 제물이 되기를 자원했으므로 이 구원 사건은 단순히 아브라함의 신앙뿐 아니라 이사악의 신앙도 함께한 것으로 표현한다.
인류의 구원을 위해 아무 죄 없으신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인 것을 성체 찬가인 아베 베룸 (Ave Verum)에서는 다음과 같이 아름다운 표현을 하고 있다.
“성체 안에 계신 예수, 동정 성모께서 나신 주. 모진 수난 죽으심도 인류를 위함일세.”
성서는 아브라함의 이사악의 봉헌을 하느님께서 자기 아들 예수를 인간 구원을 위해 스스로 희생양이 되셨음을 미리 알리는 예표로 설명하고 있다.
아버지가 아들을 살해함으로써 하느님의 뜻을 이룬다는 세속적인 차원의 일화가 아닌 아버지와 아들 모두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함께 협력했다는 신앙의 정수를 알리고 있다,
사족으로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죽이기 위해 차고 있던 떨어트린 칼을 보면 살해용 칼보다는 장식용 칼로서 어울리는 그런 칼이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고 하면서 실재는 인간적 잔꾀를 부렸다는 것이 아니라 천사 아브라함 이사악 모두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자기 역할로 했다는 것을 알리고 있다.
이상적인 인간관계는 상호관계를 통해 하느님의 뜻을 드러내는 것임을 알리고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든 종교에서 자기 집단의 이익을 위해 하는 행동이 곧 하느님을 위한 것임을 착각하거나 강요하는 것을 안타깝지만 종종 볼 수 있다.
성직자나 어떤 제도가 하느님의 뜻을 강요하는 것의 방편이 되기 쉽다.
하급 성직자나 평신자들은 상급 성직자나 책임 성직자의 말을 따르는 것을 하느님의 뜻으로 착각하면서 세상엔 부끄러운 일들이 자주 일어남을 본다.
이 작품에서 보인 천사 아브라함과 이사악이 만드는 긴장된 분위기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현실적으로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이런 각도의 노력이 있을 때 하느님의 뜻은 빛을 보게 됨을 알리고 있다.
작가는 개신교 신자였으나 교회의 벽을 뛰어넘어 가톨릭 신자를 위시해서 모든 크리스천에 하느님의 뜻을 바로 따르는 것의 바른 모델을 제시했다는 면에서 이 작품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