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자
사람들은 아기의 이름을
즈카르야로 부르려 합니다.
이것은 아버지의 이름을 아들에게 주는 것으로
그들이 늘 해 오던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아기의 부모는
그 방식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천사가 즈카르야에게 알려 준 이름을
아기에게 주면서
하느님의 뜻을 따라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사실 아버지의 이름을 아들에게 주는 것은
아버지처럼 아들도 잘 살기를 희망하는
축복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지만 요한의 경우 그 축복은
하느님 뜻에 순명하는 것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아버지의 의심이 그 축복을
잠시 멈추게 한 것처럼 보이지만
또 다른 순간에 이루어진 순명은
그 축복이 여전히 유효함을 보여줍니다.
여기에서 나타난 하느님 축복의 특징은
상호성입니다.
그것을 주시려는 하느님과
그것을 받으려는 인간의 상호 작용으로
축복은 우리 안에 머무릅니다.
우리의 실수로
하느님께서 당신의 축복을 거두어 가지는
않으십니다.
즈카르야가 의심했다고 해서
하느님께서 엘리사벳이 임신하는 것을
중단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잘 받아들이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때로는 우리에게 익숙한 방식과 달라서
하느님에게서 오는 축복을 받아들이기
어렵기도 합니다.
내가 기대하고 예상한 대로
이루어지기 보다는
그 반대로 진행되어
그것이 축복이 아니라고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런 경우에 바로 알아듣지 못하고
바로 그 축복을 받아들이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계속해서 우리를 두드리시는
하느님께서 계시기에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순간에 응답하면서
그것을 받아들이면 될 것입니다.
알아듣지 못해서 답답한 마음도 있지만
우리가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 머물러 있다면
그 시간은 어쩌면
더 잘 받아들이기 위한
준비의 시간이지 않을까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