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와 비슷한 사람을 만들자
기대감을 포기하면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기대감은 자신이 했던 어떤 행위에 대한 보상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크든 작든 간에 뭔가를 해 놓고 거기에 합당한 결과를 기대하는 것을 말합니다. 현실이 내가 원하는 대로 되어 있기를 바라기에 불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내가 미리 정해놓은 기대에 미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든 희생이든, 하느님과 너를 위해 무엇인가를 조금이라도 했다면 기대감이 생깁니다. 여기에서 인과응보의 틀이 작동하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모든 기대치는 분노로 끝나고 맙니다. 실패와 후회와 낙담의 경험이 여기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선을 행하고 나면 반드시 흔적 지우기를 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래야 마음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고 자유를 빼앗기지 않습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여도 나는 나대로 남아 있을 때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자신들이 인정하든 하지 않든 간에 일종의 신이나 중심이 되는 기준점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자신들이 가장 먼저 충성을 바칠 곳과, 기준이 되는 존재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한 신이 삼위일체 하느님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자신을 내어주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힘으로 지배하는 그러한 신이라면 늘 불안하고 두렵고 마음에 부담을 주는 신으로 남아 있게 됩니다. 그러한 신에게 미움을 사는 일이라도 하게 되면 벌이 두려워 바쳐야 할 것을 엄격하게 강화하고 더 많은 양의 희생과 재물을 바쳐야 한다고 스스로 져야 하는 짐을 더 무겁게 만들어 놓습니다.
앙갚음하시는 하느님, 강압적이고, 배타적이며 두려움을 주는 하느님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부모들에게서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먼저 벌을 주고 주의를 주는 부모의 세계 안에서 영향을 받으며 성장하였습니다. 그래서 인과응보의 틀을 자신들이 살아갈 삶의 기준으로 삼게 된 것입니다. 모든 잘못된 사건 뒤에는 잘못된 이미지가 있게 마련입니다. 그것이 하느님에 대한 잘못된 이해입니다. 복수가 필요한 사람들은 복수하시는 하느님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이러한 왜곡된 이미지는 인과응보의 틀을 하느님께 적용함으로써 벌주시는 하느님, 복수하시는 하느님을 이야기하지만, 그것이 삶을 변화시키지는 못합니다. 벌이 두려워 사랑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 안에서 성부는 완전한 내어줌의 신비이며 원천의 신비입니다. 하느님은 내어줌 그 자체이십니다. 하느님이 절대적 내어줌이시라면 그 사랑의 흐름은 항상, 그리고 영원히 긍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갈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느님의 화나 진노 어떤 식으로든 못마땅해하시는 이야기는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관대함과 용서를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믿음만이 내면에서 흐르는 사랑의 흐름을 느껴 자신을 변화하도록 이끌어줍니다. 내면에 사랑의 흐름이 없을 때 그 흐름을 바깥으로 나가게 할 수는 없습니다. 관계성의 질을 높여주는 내어줌의 신비가 신앙의 신비입니다.
하느님의 창조 이야기에는 우리가 하느님과 비슷한 형상으로 창조되었다고 전해줍니다. 우리에게 있어 무엇이 하느님과 비슷한 형상일까요? 하느님이 내어줌 그 자체라면 우리에게 있어서도 내어줌의 속성이 있다는 말입니다. 비록 내가 죄 중에 있을 때라도 나에게 부여된 속성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내어줌이 우리 안에 잠자던 내어줌의 속성을 깨웁니다. 내어줌이 있는 곳에 하느님의 현존이 있고 하느님의 현존이 있는 곳에 하느님 나라의 현재가 관계 속에 발견됩니다.
세상은 온전히 긍정적인 대지와 토대 위에 자리를 잡아야 합니다. 죄와 수치, 대가, 그리고 벌을 주제로 하는 슬픈 이야기들은 우리 삶을 불안하고 엉망으로 만듭니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시간 동안 우리의 삶을 황폐시키는 이미지에 시달려 왔습니다. 본래의 축복에서 시작하는 믿음, 원죄가 아니라 원복에서 출발하는 믿음, 상호 간에 내어주시는 삼위일체 하느님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내면에서 흐르는 사랑의 흐름이 내어주는 기쁨으로 관계를 밝힌다면 하느님 나라는 이미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