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그대로의 흐름을 타지 않으면
주님의 영과 그 영의 활동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지극히 단순하고 자연스럽습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평범하고 순수한 자연 그대로 살아갑니다. 참된 영성의 토대는 두려움이 아니라 기쁨이기에 살아있는 파도에 따라 너울거리듯, 바람결에 나뭇가지가 흔들리듯, 기쁨을 지니고 영의 흐름에 따라 자신을 온전히 내어 맡긴 채 파도 위에 떠 있는 나뭇잎처럼 너울거립니다.
자신 안에 머무시는 영의 현존은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고, 이미 하느님과의 관계성 속에 있다는 사실을 너와 나의 관계 속에서 내어주는 기쁨으로 표현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신앙의 신비는 관계성의 신비이기에 관계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습니다. 신앙의 신비는 내어주시는 하느님으로부터 내어줌을 배워 너와 피조물을 향하여 나를 내어주기 시작하면서 성장합니다. 내어줌이 있는 곳에는 어떤 예식을 거행하느냐가 문제가 아니며, 어떤 계명을 지키느냐도 문제가 아닙니다. 희생을 얼마나 바치고 재물을 얼마나 바쳤는가도 전혀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 것들이 나를 하느님께 데려다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로는 로마서와 갈라티아에서 계명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하느님 체험으로 이끌어 주지 못한다는 것을 매우 뚜렷하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이 여전히 자신들이 바른 일을 하여 하느님께 간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계명 준수와 도덕적 성취와 자신이 바른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이 잘하고 있다는 선입견을 스스로 만듭니다. 자신의 선입견이 자아도취적이고 결벽증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대개 쉽게 판단하고 단정 지어 버리며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명분만 있지 실제로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삶 자체도 사랑하지 않으며 가까이 있는 사람들도 사랑하지 못합니다. 얼굴과 몸에 나타나는 모습은 피로에 지치고, 갈등에 지치고, 해야만 한다고 자신이 정해놓은 기도에 지치고 삶의 의욕도 잃어버린 듯 반복적으로 그렇게 살아갑니다. 가짜 자아가 내면에서 그렇게 부추겨 자연 그대로의 흐름을 타지 않은 채 계명을 지키기에 그러한 것입니다. 티를 내고 소리가 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벌들이 꽃을 찾아 꿀을 먹어도 꽃을 조금도 손상케 하지 않는 것처럼, 사랑은 소리를 내지 않으며 티를 내지 않습니다.
때 묻지 않은 순수의 흐름 속에서 자연이 주는 위대한 감화를 느끼며 살아가도록 하느님만이 이 삼위일체의 사랑의 흐름으로 우리를 데려다 줄 수 있습니다. 행복과 불행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그만큼 행복해지기도 하고 불행해지기도 합니다. 기쁨과 명랑함을 지니고 쾌활하게 사는 사람은 하느님의 무상성에 대한 응답으로 그렇게 살아갑니다. 무상으로 내어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에 내어주는 사랑으로 응답하는 사람은 자연스러우면서도 묘한 매력으로 사람을 끌어당깁니다. 존재의 가벼움을 기뻐하는 그들이 있어 세상은 풍요롭습니다.
인간사의 모든 고통과 슬픔은 내가 주도권을 가지고 해결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파도 위에 떠 있는 나뭇잎처럼 너울거리는 파도 위에서 파도와 함께 너울거릴 뿐입니다. 자신을 내어 맡긴 채 연약함과 무력감으로 그렇게 떠 있을 뿐입니다. 더 이상 저항하지 않으면서 자연 안에서 다른 피조물과 함께 봄에 태어나 여름날 한창 푸르렀다가 곱게 물든 가을과 눈 내리는 겨울을 맞이할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선에서 나오는 선의 흐름을 따라 관계를 맺는 삶이 지금 내가 가장 우선으로 해야 할 일입니다. 무상성과 보편성으로 인류를 사랑하시고 돌보시는 하느님의 함께 계심은 우리의 관계 안에서 무상성과 보편성이 자리를 잡지 못하면 하느님은 의미가 없어집니다. 내어주는 나의 삶으로 너를 비추고 반사된 선이 관계에 새로운 창조의 에너지를 불어넣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선에서 나오는 이 흐름을 알고 내가 이 흐름 안에 있음을 기뻐하면서 명랑하고 쾌활한 모습으로 다른 피조물들과 함께 너를 만난다면 이미 하느님 나라의 현재를 관계 안에서 발견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