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할 일이 많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할 일이 없어 빈둥거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일을 좋아하고 부지런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라고 얘기할 수도 있지만
오늘 복음의 주님과 바리사이를 비교하면 다른 관점에서 얘기할 수도 있을 겁니다.
사랑의 관점인데
사랑이 많은 사람은 할 일이 많고
사랑이 없는 사람은 할 일이 없습니다.
어제도 한 의사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분은 큰 병원의 내과 과장이시고 그 병원 의사와 간호사들을 모아
봉사회를 꾸려가시는 분인데 우리 협동조합 산하에 이주민들을 위한
주말 의료 봉사를 하려고 몇 번 만났던 분입니다.
그러나 코로나와 다른 이유로 인해 추진을 중단했는데
코로나 상황이 나아졌으니 이제 시작함이 좋지 않겠냐고 먼저 제의해오신 겁니다.
그분을 뵐 때마다 너무 감탄스러운 것은 어찌 그리 지치지 않는 열정이 있으시고,
코로나 시국을 지내며 당신 본업만도 너무 많아 다른 것은 생각조차 어려울 텐데
이것저것 봉사할 궁리를 그렇게 하시는지 그 에너지가 대단하다는 것입니다.
이분처럼 할 일이 많은 사람은 성향 차이가 아니라 사랑 차이입니다.
사랑이 많은 사람은 에너지가 많은 사람이고 그래서 할 일이 늘 많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어쩌면 잘못된 말입니다.
할 일이 많은 것이 아니라 사실은 사랑이 필요한 사람이 많은데,
사랑이 많은 사람은 그것을 보고 사랑이 없는 사람은 그것을 보지 못하는 겁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은 자가만 보고 자기 밖의 것은 보지 못합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은 자기 연민에만 빠져 다른 사람의 아픔을 볼 수 없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또 다른 차원에서 다른 사람의 아픔을 볼 수 없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다른 이의 아픔보다 그의 죄와 잘못을 먼저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런 교만한 사람 밑에 있는 사람은 늘 죄와 잘못을 지적당하고,
그래서 하느님의 사랑을 만나기보다는 죄인으로 기가 꺾여 살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이런 교만한 바리사이들 밑에서
시달리며 기가 꺾인 군중을 보시고 가엾이 여기시는 주님을 전합니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가여운 군중 그러니까 가여운 많은 사람을 보시고,
그들을 위한 일 또한 많음을 보시며 이렇게 안타까움을 토로하십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주님의 이러한 토로는 지금도 계속됩니다.
아니, 지금 더 많이 토로하십니다.
지금 많은 복지시설에서 자원봉사자의 부족을 토로하고,
<여기 선교 협동조합>과 <여기 밥상>도 일꾼이 부족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이주민들을 위한 주말 의료 봉사를 위한 일꾼,
영어교실을 위한 영어 선생님(회화가 가능한),
심리 상담 봉사자, 요리 봉사자, 단순 봉사자 등 많은 일꾼이 필요합니다.
나는 사랑이 부족하다고 망설이는 분이 있다면
사랑은 사랑을 실천할 때 성장하는 것이니 용기 내시라고 말씀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