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집안의 열두 지파를 대표하는 열두 사도를 제자들 가운데서
뽑으신 주님께서 이제 그들을 파견하시는데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을 찾아서 가라고 하십니다.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하고 선포하여라.”
주님께서 다른 민족들에게는 가지 말라고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이 말씀이 과연 주님이 하신 말씀인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맞다면 그 뜻이 무엇인지 생각게 하는 말씀입니다.
물론 우리는 압니다.
이 말씀은 주님의 진심이 아님을.
주님께서 열두 사도를 다른 민족들에게는 파견치 않으시고,
이스라엘의 길 잃은 양들에게만 파견하셨을 리 없으시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는 또한 압니다.
이것은 마태오 복음사가의 복음 선포 방식이요 전략임을.
이스라엘 사람을 대상으로 복음을 쓴 마태오 복음사가는
이스라엘 집안이 다른 민족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하느님의 집안이기를 바라지만,
이 집안이 흩어지고 망해가고 있으니 먼저 이 집안의 길 잃은 양을 찾아가라는,
그러니까 먼저 이스라엘 집안을 모으고 다음으로 다른 민족에게 가라는 거지요.
실제로 마태오 복음의 맨 끝을 보면 부활하신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을 모든 민족에게 파견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이것은 ‘형제적 공동체’를 주제로 피정하는 우리에게 아주 적절한 가르침입니다.
먼저 공동체의 복음화를, 그다음에 세상의 복음화를 하라는 가르침 말입니다.
이것은 수신제가치국평천하 修身齊家治國平天下하라는 가르침과도 같을 것입니다.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화롭게 할 사람은,
먼저 자기를 닦고 집안을 가지런하게 해야 한다는 말씀처럼
세상을 복음화하기 앞서 자신과 공동체를 복음화해야겠지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내가 길 잃었다면 나의 성소를 먼저 찾아야 하고,
같이 사는 형제가 길 잃었다면 그의 성소를 찾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런데 실은 나의 성소를 찾는 것이나 형제의 성소를 찾는 것이나 같은 것입니다.
우리의 성소는 공동의 성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그의 성소를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
공동체도 나의 성소를 소중히 여기지 않을 것이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루카 복음이 길 잃은 양이라고 하지 않고 잃은 양이라고 한 것도 이 뜻일 겁니다.
그 형제가 길을 잃은 것이 실은 우리가 그 형제를 잃은 것이라는 뜻일 겁니다.
그래서 백 마리 중에 한 마리라고 해서 한 마리를 소중히 여기지 않고 찾지 않으면
그 한 마리 양만 잃는 것이 아니라 다른 아흔아홉 마리도 잃게 될 것입니다.
백 마리란 한 마리, 한 마리가 모여 백 마리가 된 것이고,
그래서 한 마리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 공동체는
다른 아흔아홉 마리도 소중히 여기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칸의 성소와 사명을 흔히 파견되어 가는 성소라고 합니다.
“가서, 무너져가는 내 집을 고치라.”라는 성소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프란치스칸들은 교회 밖 이교도들에게 가기 전에
먼저 교회 공동체 안으로 파견되어 갔고,
길 잃고 흩어진 이들을 교회 공동체 안으로 모으러 찾아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가장 가까운 데서부터
차츰 먼 곳으로 찾아가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