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주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듯 당신도 우릴 사랑하셨다고 하시며
당신 사랑 안에 머물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오늘 제게는 머물라는 명령이 아니라
머물러달라는 부탁, 호소 내지는 애원으로 들립니다.
이는 마치 부모의 사랑을 받으면서도 우습게 여기고
애인의 사랑에 빠져있는 자식과 부모의 관계처럼 느껴집니다.
많은 불효자식이 철부지일 때는 부모의 사랑은 받으면서
부모의 사랑 안에 머물지 않고 애인한테 떠나가 버리지요.
사랑은 부모로부터 받고 사랑이 향하고 머무는 곳은 애인입니다.
잠자고 먹는 곳은 집이지만 사랑이 가는 곳은 애인이며
돈은 부모로부터 받고 선물은 애인한테 주는 이런 자식들이
부모에게는 단물만 빼먹고 뱉어버리는 못된 놈처럼 느껴지고
이런 자식들에게 부모는 배신감이 들기도 할 겁니다.
이러기도 합니다.
저 좋으라고 하는 부모의 말은 듣기 싫다 하고
자기도 이제 컸으니 제발 이래라저래라 하지 말라면서
애인이 하는 말은 너무 달콤하다고 하고
애인이 원하는 것은 말이 혀끝에 오르기도 전에 해주려합니다.
그래서 보다 못해 그럴 거면 돈도 타서 쓰지 말고 아예 나가서 살지
왜 돈은 타서 쓰면서 부모의 말은 들으려 하지 않느냐고
제가 대신 잔소리, 쓴 소리를 하곤 하지요.
그러다 철이 들어서야,
부모가 되어 부모처럼 사랑을 하고 나서야 그 사랑을 이해합니다.
그러고 보니 사랑을 아는 것은 사랑이고,
잔소리가 사랑이라는 것을 아는 것도 사랑이며,
계명이 당신을 위한 요구가 아니라
우리를 위한 사랑이라는 것을 아는 것도 사랑인 것 같습니다.
실상 주님의 계명이란 게 무엇입니까?
서로 사랑하라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 계명은 당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것이고
당신 사랑 안에 머물라는 것도 당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당신 사랑 안에 머물 때 그것이 우리의 참 행복이 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여기서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내 기쁨”, 곧 당신의 기쁨이라고 말입니다.
그제 세상의 평화와 다른 당신의 평화를 말씀하셨듯이
오늘은 우리의 인간적인 기쁨과는 다른 당신의 기쁨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어떤 것이 우리의 기쁨과 다른 주님의 기쁨일까요?
그 기쁨을 언설로 표현하는 것은 부족할 뿐 아니라 주제넘을 것 같습니다.
당신 사랑 안에 머물고 당신 계명을 지키면 그 기쁨이 우리 안에 있다니
언설로 설명하고 그렇게 알기보다는
주님의 계명을 지켜 주님 사랑 안에 실제로 머묾으로써
그 기쁨을 직접 느껴 아는 게 더 나을 것이니 오늘은 이만 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