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주님의 동선이랄까 행위를 보면 이렇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죽은 소식을 듣고 배를 타고 혼자 외딴곳으로 가십니다.
이것을 안 사람들은 극성스럽다 싶은 정도로 육로로 주님 계신 곳으로 갑니다.
이에 주님께서는 사람들을 가엾이 보시어 병을 고쳐주시고
이어서 굶주린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십니다.
주님은 요한의 죽음 다음에 당신의 시간이 필요하셨나 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주님을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주님의 상태를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사람들을 주님께서는 성가시다고 생각하시거나
화내지 않으시고 오히려 가엾이 보시고 치유해주십니다.
오늘 저는 이런 주님의 사랑을 보면서 성찰케 되었습니다.
주님의 사랑과 열정에 감동하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지만
저도 이렇게 해야 하는지, 이렇게 할 수는 있는지 성찰케 되었습니다.
우선 저는 이렇게 할 수 없습니다.
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저는 참으로 많은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즈음부터 과부하가 걸리는 저를 보게 되었습니다.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일을 하였고,
일도 힘에 부치니 금세 지치고 그래서
일을 하며 자주 짜증을 내고 화까지 내었으며
제가 잘못하고서는 옆 사람에게 그 탓을 돌리곤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해 처음으로 휴가다운 휴가를 가지며 왜 이렇게 되었을까 성찰하였는데
우리가 흔히 말하는 피정이나 쉼을 통한 재충전의 시간을
제가 가졌어야 했음에도 그러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도 반성하였지만,
오늘 다시 오늘 주님처럼 나의 시간 그러니까 재충전의 시간 없이
모든 시간을 이웃을 위해 내주는 것이 과연 잘하는 것일까,
주님처럼 할 수 없다면 주님의 사랑에 그저 감동과 감탄이나 하며
나는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성찰케 되었습니다.
그런데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게 해서는 안 되고,
주님도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의 일상을 소개하는 마르코 복음 1장을 보면
주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를 고쳐주시는
고된 일정을 소화해내시고 다음 날 새벽 외딴곳으로 가 기도하셨으며,
제자들에게도 외딴곳으로 가 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외딴곳으로 가신 것은 오늘뿐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요한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외딴곳에 가신 것이거나
요한의 죽음에 당신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어서 특별히 가신 것이 아닙니다.
실로 요즘 사람들은 혼족이라고 할 정도로
혼자 밥 먹고 술 먹으며 병적으로 혼자 지내지만
정작 외딴곳에 홀로 가는 것은 하지 못하거나 않습니다.
혼자 있으면서 스마트폰과 종일 지내고
사람들과 대면하고 하느님과 대면하는 시간은 피하고
가상 공간과 폐쇄 공간에서 이상한 내용이나 뒤지면서 하루를 흘려버립니다.
주님처럼
열심히 일하고,
뜨겁게 사랑하고,
그런 다음 기도와 쉼의 시간,
곧 사랑 재충전의 시간을 외딴곳에서 갖는,
그런 지혜롭고 조화로운 삶이 실로 요구되는 요즘 우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