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십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그것을 반대합니다.
반대하는 베드로를 예수님께서는
걸림돌이라고 표현하십니다.
그러면서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사람은 누구를 가리키는 말일까요?
베드로는 과연 누구를 위해서
예수님의 수난을 반대했을까요?
그리고 그 생각은 예수님의 꾸중을 들을 정도로
잘못된 것일까요?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첫 번째 경우는
예수님을 위해 수난을 반대한 경우입니다.
지금까지 예수님께서는
많은 기적과 가르침을 보여주셨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인기가 점점 높아지는 상황에서
갑자기 수난 예고를 하시는 것은
그 인기가 하루 아침에 물거품이 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굳이 그렇게 하지 않으셔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베드로에게 들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기다려온 메시아의 모습과 같았고
그래서 그렇게 메시아가 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즉 메시아가 되는 길에 있어서
수난을 통하는 하느님의 방식과
베드로가 생각했던 인간적인 방식이
서로 다릅니다.
두 번째 경우는
베드로가 자신을 위해 반대한 경우입니다.
인기가 좋은 스승님이시기에
그 인기에 자신도 영향을 받아 왔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잘 알고 있습니다.
자신은 가진 능력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스승님께서 돌아가시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전의 어부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을
원하지는 않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베드로가 굉장히 이기적인 사람으로 생각되지만
우리 마음 속에도 이런 마음이
없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이런 마음이 잘못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그들이 나중에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을 심판하는 엄청난 권한을 예고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서
무엇인가 얻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생각해서
예수님의 수난을 반대했습니다.
자신을 위한 마음이 없지는 않겠지만
그것이 전적으로 잘못된 생각이라고
보기는 힘듧니다.
그럼에도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방식을 선택하십니다.
베드로도 그것이 하느님의 방식이라는 것을
미리 깨달았다면
예수님의 수난을 반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꾸짖으신 것은
베드로의 인간적인 생각, 이기적인 생각이 아닙니다.
결국 수난이 하느님의 구원 방식임을
알려주시기 위한 과정이었다고 생각됩니다.
하느님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행동하지만
정작 하느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것을 선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 결정이
그 사람보다는 나를 위한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우리가 나의 마음을 속속들이 알기는 어렵지만
나의 선택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나를 위한 생각이 잘못은 아니지만
나만을 위한 선택,
그리고 그것 때문에
하느님의 방식을 놓치는 선택이
되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