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나라의 새 이름 (상호존중의 원 안에서 누리는 참여)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미지는 삼각형의 꼭대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까지는 많은 세월이 흐른 다음이었습니다. 처음부터 내가 인식하고 믿어 왔던 하느님은 꼭대기에서 전능한 힘으로 통치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은 상호존중 안에서 자신을 내어주면서도 상대방을 조금도 불편하게 하거나 부담을 주지 않는 관계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얻은 결론은 “내가 너를 사랑하여도 나는 나대로 남아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상호존중의 원 안에 자신의 자리를 잡는 것을 배우게 되면 자신을 내어주면서도 상대방을 자유롭게 하는 법을 터득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시는 관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하느님 나라의 전체적인 그림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초월을 향한 움직임 안에서 거룩한 것과 세속적인 구분이 사라지고 자연과 초자연 사이의 경계가 사라져 하느님 안에서는 모든 것이 거룩하고 소용이 있게 됩니다. 상호존중이 얼마나 큰 사랑인가는 우리와 동등하기 위하여 하느님의 동등성을 포기하신 예수님을 통하여 드러났습니다. 상호존중의 이미지는 그래서 꼭대기가 아닙니다. 인간이 가진 인과응보의 틀은 꼭대기에서 통치하는 하느님의 이미지를 버리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자신도 꼭대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꼭대기를 점령한 사람은 죄를 지으면 반드시 벌을 받아야 한다는 논리로 폭력을 정당화시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알려주신 하느님은 벌주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용서하시는 아버지였습니다. 우리의 죄와 실수까지도 그분에게는 벌을 받아야 할 이유가 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자비가 힘을 포기하는 사랑이라는 사실을 십자가를 통해서 일깨워주셨습니다.
하느님의 거룩함이 관계 안에 흐르게 하는 것이 자비와 선입니다. 이 신성한 흐름에 대한 거부는 누리고 참여하기를 거부하는 인간의 마음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하느님의 작업장입니다. 이 작업장에서 우리는 꼭대기에 있기를 원하기에 도구적 존재라는 사실을 잊어버립니다. 목표에 다다르기까지의 과정에 도구적 존재의 삶으로 초대되었다는 사실보다 우월감과 지배의 구조에 익숙한 나머지 참여해서 누리는 하느님 나라를 죽음 이후에 오는 처벌과 보상이라는 틀로 만들었습니다. 그로 인하여 벌주시는 하느님처럼 나도 잘못한 이를 용서하기보다 벌을 줘야 마땅하다는 논리로 힘을 행사합니다. 폭력이 정당하다고 여기면서 관계를 어렵게 만듭니다. 통제하는 관계, 꼭대기에 앉아 통치하고 지배하는 나라를 건설해야 한다는 과도한 탐욕이 인간의 마음을 채우고 있기에 주님의 영이 머무를 자리가 없습니다. 자신이 주인이 아니라 도구라는 사실을 모욕적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부담을 주는 사랑은 상호존중을 잃어버린 사랑입니다. 아무리 좋은 명분을 내세워도 사랑이라는 미명으로 저지르는 폭력은 정당하지 않습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신성한 선의 흐름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는 이 거부와 저항은 실질적인 죄의 현장입니다. 죄는 하느님의 무상성과 보편성이 관계 안에 자리를 잡지 못하도록 자신의 잣대와 저울로 자격심사를 통해 용서를 가로막거나 단절시킵니다.
자연 안에 살아가는 모든 피조물의 얼굴에는 참여하는 신비가 있습니다. 나는 찬미와 상호존중의 원이라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원 안에 나의 얼굴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 충분하고도 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