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의 좋음을 표현하는 예술
영의 인도를 받으면 내면의 기쁨을 표현하는 방식이 달라집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는 느낌이 커지면 커질수록 내면의 기쁨은 시와 음악으로 표현하다가 황홀경에 이르게 되면 춤으로 표현합니다. 찬미와 찬송을 넘어 찬양이라는 최상의 흠숭을 춤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춤을 추는 이유는 내어주시는 하느님의 놀이에 자신도 내어주면서 참여하는 춤입니다. 내어주는 기쁨을 춤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 춤에는 방식이 따로 없습니다. 영의 흐름에 맡겨진 춤은 틀이 필요 없기 때문입니다. 최상의 좋음을 춤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 춤을 추는 사람은 어떤 형식에도 구애받지 않습니다. 인간이 가진 최상의 예술은 내면의 기쁨을 춤으로 드러내는 거기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프란치스코는 하느님으로부터 무상성과 보편성을 배웠고 이것이 내어주는 기쁨의 원천이었습니다.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시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놀이에서 노래와 춤을 배웠습니다. 그는 모든 피조물 안에서 일하시는 하느님의 돌보심을 발견하는 장소가 형제적 관계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그로부터 온 우주가 사랑의 원무(圓舞) 안에서 함께 춤을 추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춤추는 사람은 누구로부터 조종당하지 않고 누구도 조종하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조종하고 싶어 하는 마음으로는 춤을 출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온유한 마음과 겸손한 마음은 통제하려는 유혹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해줍니다. 이 마음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배우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인과응보와 처벌과 보상의 일상의 체제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십니다. 돈에서 자유로운 사람, 쾌락과 편안함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되기까지 더 좋은 선물이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십니다. 내면에서 보물을 발견하기까지 우리는 그 틀을 버리지 못할 것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누리는 자유가 그 어떤 보물보다 귀한 것이라는 인식을 얻기까지는 자유로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것에도 묶이지 않는 자유를 얻으려고 성프란치스코께서 택하신 것, 그것은 가난과 겸손이었습니다. 그에게는 그것이 그 어떤 것보다 더 귀한 보물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철저하게 따르고, 닮고 싶어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가난이 드러난 것은 예수님의 육화와 겸손이었습니다. 육화의 겸손과 수난의 사랑이 그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았습니다. 그에게는 성취해야 할 더 높은 곳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높은 곳을 발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높은 곳이 바로 바닥이었습니다. 가난과 겸손은 우리를 밑바닥에 이르도록 끌어당깁니다. 밑바닥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내어줍니다. 아무것도 내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는 가난함이 주님의 영께서 머무실 거처를 얻는 방법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무상성에서 거저 받은 선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특권과 예외, 독점과 소유를 탐하는 사람들은 밑바닥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위대한 춤에 참여하는 기쁨은 바닥에서 나옵니다. 가난한 사람은 주변의 관심을 받고자 일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평가와 인정과 칭찬을 들으려고 일하지 않고 하느님의 이름을 빛나게 해드리고, 아버지의 나라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일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가난하심은 혁명을 불러왔습니다. 가난은 자신을 바닥까지 내려가게 하고 바닥까지 내려놓게 합니다.
가난은 인과응보와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의 방식을 선택합니다. 하느님의 무상성에 기반을 둔 방식을 선택합니다. 우주 만물을 돌보시는 창조가 계속되는 사실을 보는 눈은 가난한 마음이 없이는 볼 수도 느낄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바닥에서 사는 이들의 기쁨은 기쁨에 찬 가난에서 나오고 이 기쁨이 커지면 삼위일체 하느님의 춤에 참여하는 최상의 좋음을 경험합니다. 이러한 내면의 충만함이 남들의 시선을 잊어버리게 하고 바닥에서 춤을 추어도 자유롭습니다. 그러므로 내면의 자유를 지닌 이들의 현존은 전염성이 큽니다. 그들이 보여주는 믿음이 매력으로 끌어당기기 때문이며 하느님의 매력을 관계 안에서 보여주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