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을 어둡게 하는 헛된 환상
사랑을 맛보고 느낄 수 있는 것은 신학교가 아니라 관계입니다. 하느님과 나 사이에, 너와 나 사이에, 창조된 모든 피조물과 나 사이에 관계성을 잃으면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립니다. 자만심이 무성한 땅에는 선을 어둡게 하는 헛된 환상 속에서 자아도취와 우월감만 자랄 뿐입니다.
하느님의 에너지는 인간의 노력에 따라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염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표현과 에너지가 죽어 있으면 가르침이 전달되지 않습니다. 선이 흐르는 곳에서 기쁨이 발생하고 기쁨이 있는 곳에 자유가 있으며 기쁨에 찬 가난은 자유 안에서 가장 강렬하게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선은 그렇게 자발적이며 확산하는 신비로 드러납니다.
믿음과 신앙의 영적 여정에는 계산하는 법이 없습니다. 계산을 하는 것은 아직 자기중심적 울타리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계산을 멈추는 것은 하느님 사랑에 연결되어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받은 사랑에 응답하는 사람 또한 계산하지 않습니다. 은총의 질서에는 계산하지 않는 하느님이 계십니다. 그분께서는 오직 주시기만 하십니다. 무상으로 내어 주시는 자비 안에서 생명을 얻고 살아가는 이들은 정말로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며 내가 누구인가에 마음을 집중하면서 기쁨으로 자신을 내어 줍니다. 다시 말해 도구적 존재로 살아가는 이에게는 주님의 영과 그영의 활동이 나를 통해서 관계 안에 흐르게 하는 일이 전부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객관적으로 하느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이미 고향에 돌아온 것이며 우리가 받을 상속은 이미 시간에 앞서서 주어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꼭대기를 차지하려는 마음과 입증하고 방어하는 대신에 삶을 향유 할 수 있습니다.
진리는 믿음 안에 자리 잡습니다. 하느님을 아는 명료함 안에서 개별성의 관점에서 보면 더 이상 하찮은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모든 것이 은총이라는 사실에 직면합니다. 천하다고 여기는 것들을 통해 보물을 발견하는 믿음만이 중요합니다. 하느님의 창조가 태초부터 만물을 성스러운 것과 속된 것의 구분이 없는 은총으로 구성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랑만이 사랑을 알아봅니다. 선의 흐름에 자신을 내어놓는 믿음은 신앙에 대해 말하기 전에 신앙을 관계 안에 정착시킵니다. 관계는 신앙이 태어나고 자라고 열매를 맺는 땅이며 하느님의 현존을 거기서 발견합니다. 그러므로 관계가 단절되면 고립되어 외롭고, 사람에 대한 존중과 자유를 허용하지 않으며 오로지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 되어갑니다. 그렇게 되면 폭력으로 억압하면서도 그것이 하느님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들은 무지하고 무능하며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인간의 탐욕과 자만심이 만든 왕국, 그 안에서 모든 관계를 자신의 지배하에 두려는 야심만이 남아 하느님의 창조 질서를 어지럽힐 뿐입니다.
선을 어둡게 하는 헛된 환상에서 해방과 자유를 얻는 길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배웁니다. 꼭대기가 바닥이 되고 바닥이 구원을 얻게 해 주는 역설의 하느님 나라가 육화의 도구로 살아가는 이들을 통해 실현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