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져 환히 나타나기 마련이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등불을 켠다는 것은.
어둡기 때문이다.
밝히기 위해서다.
그러니 주님 말씀대로 등불을 켠 사람은 그것을 덮을 이유가 없다.
만일 덮는다면 어리석음이고 바보짓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은 등불을 켜서 덮는 것이 아니라 아예 등불을 켜지 않는다.
어둡다고 생각지 않기 때문이다.
어두워도 그 어둠을 내가 밝힐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실로 많은 사람이 어둠을 어둠이라고 생각지 않고 산다.
어둠에 적응된 사람이거나 어둠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둡다면서도 불을 밝히지 않는 사람도 제법 많다.
투덜거리기만 할 뿐 자기가 불을 밝히려고 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밝히기를 바라고,
다른 사람이 밝혀야 한다고 하고,
다른 사람이 밝히지 않는다고 투덜거리기만 한다.
그래서 네가 밝히면 되지 않냐고 하면
자기는 등불이 없다고 겸손을 핑계로 대거나
등불을 드는 그 귀찮고 힘든 일을 왜 자기에게 하라고 하냐고 오히려 성을 낸다.
의지가 없다고 하지 않고 등불이 없다고 하고,
사랑이 없다고 하지 않고 능력이 없다고 한다.
또 소시민 정체성에 안주한다.
‘나 같은 소시민이 뭘!’이라는 안주다.
그런데 빛이 되는 일에는 아무도 소시민이라 예외가 아니고 아니어야 한다.
큰 등불이 없다면 작은 등불이라도 있으면 된다.
역시 의지 없고 사랑 없음을 소시민 정체성으로 합리화하는 것뿐이다.
어쭙잖은 겸손과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주님 말씀을 엉뚱하게 이해하여 그럴 수도 있다.
그제는 기후 정의 미사와 행진이 서울역에서 있었는데
그 미사를 봉헌하면서 그리고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저의 생각이 짧았고 노력도 부족했음을 알게 됐습니다.
주례하신 주교님께서 여야 할 것 없이 정치권이
기후 위기의 급박한 문제에 관해 관심이 없고 그래서 대책을 서두르지 않는데
이 자리에 천만 명이 모였다면 그들이 그러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실 사람들이 그리고 사제들이 정치 사회 문제와 관련해서는 촛불을 드는데
더 큰 위기인 기후 문제와 관련해서는 촛불을 드는 사람도 사제도 많지 않습니다.
저도 평소 할 수 있는 한 실천하고 주위에도 얘기하였지만
그제 주교님 말씀을 듣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면피 수준이었습니다.
더 적극적으로 실천하고 운동을 펼쳤어야 하는데
나의 실천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핑계로,
나의 실천을 떠버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소극적으로 사람들에게 권유하고,
그제 모임도 이 말씀 나눔을 통해 여러분에게 홍보할 수 있었는데도
여러분에게 적극적으로 홍보하지도 초대하지도 않아서 반성했습니다.
나의 선행이 자랑이 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사랑이 되고 빛이 되게 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는 오늘 우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