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에페소 평화기도 다락방 말씀 기도
2023년 9월 29일 금요일
교부들의 말씀 묵상
탐욕은 우상숭배와 같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무지한 채로 있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기회 있을 때마다 놓치지 않고 유익한 말씀으로 우리를 가르치시지요. 그래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그분은 우리에게,탐욕은 악마의 함정이요 하느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임을 알려 주셨습니다. 지혜로운 바오로 사도는 “탐욕은 우상숭배"(콜로 3,5)라고까지 합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자들에게 딱 어울리는 말이지요. 막대기와 돌을 섬기는 자들의 더러움과 맞먹는 것이 바로 탐욕이기 때문입니다. 탐욕은 악한 영들의 올가미입니다. 그것으로 사람의 영혼을 옭아매어 지옥의 그물로 끌어내리지요. 그런 까닭에 주님께서는, 삼가 조심하여 크고 작은 모든 ‘탐욕을 경계하고’ 상대가 누구든지 속임수로 그의 재산을 훔치지 말라고 분명하게 이르십니다. 탐욕은 하느님과 인류가 다 싫어하는 것입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본서의 목적과 특징
토마스 F. 오미러 교수가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영향을 다룬 논문에서 지적한 대로, 우리가 영성과 액카르트에게 던진 물음은 엄격히 말해서 “이냐시오 이후에 등장한 것과 같은 종류의 명상 영성”에게 던져야 할 물음이다. 이것은 P. 포래트 가 쓴 영성의 역사와 영어권 독자들을 위해 편찬된 The Catholic New Encyclopedia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The Catholic New Encyclopedia는 엑카르트를 다룬 항목에서 엑카르트를 ‘진부하고 학자답지 못하고 편협한’ 인물로 묘사했다. 예컨대, 토마스 아 캠피스로 대표되는 ‘근대적 신심’(devolio modema)은 너무나 감상적이고 엑카르트와는 전혀 다르다. 정의가 권리와 다르고, 참된 자비가 감상주의와 다르고, 열정이 억압과 다르고, 변증법이 이분법과 다르고, 잔치와 조화로운 삶이 금욕적인 이원론과 다르고, 창조성이 심약한 통제와 다르고, 예술이 종교적인 오락거리와 다르듯이, 엑카르트도 ‘근대적 신심’과는 전혀 다르다. 그렇다, 엑카르트의 단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교 영성은 성서에 뿌리내린 건강한 영성을 송두리째 잃고 말았다. 엑카르트를 연구하는 주석학자들이 더러 있지만, 그들도 엑카르트의 사상과 저작을 읽어 낼 수 있는 관점을 상당 부분 놓칠 수밖에 없었다.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신학적 기반과 성서적 기반이 약했으므로 엑카르트가 아리스토텔레스 학파라는 둥, 플라톤 학파라는 둥 하면서 끊임없는 논쟁을
벌였다. 하지만 엑카르트는 아리스토텔레스 학파도 플라톤 학파도 아니다.(26)
에페소 평화기도 다락방 9월 4주간
금주간 성서읽기 루카 22-24장 / 1코린 1-2장
금주간 생태 행동
<생태 영성 주간>
생태 지향 : 고요와 침묵과 절식을 통한 단순한 삶
개인 혹은 공동체 차원에서 먼저 하루를 정해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금요일 성인의 날
영적 삶의 샘(디다케에서 아우구스티노까지), 요한 봐이스마이어 외 지음
체사레아의 바실리오
감사에 대한 강론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러므로 우는 자와 슬퍼하는 자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루카 6,21 : 마태 5,4). 웃음은 피가 솟아올라 분출하는 외적인 형상이 아니라. 순수하고 깨끗한 내적 명랑함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우리에게 “우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 울어주십시오”(로마 12,15) 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눈물은 영원한 기쁨의 씨앗이고 증거물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정신을 들어 높여 천사들의 삶을 관찰해 보십시오. 그들의 삶이 순수한 기쁨과 환희가 아니라면 무엇이겠습니까? 이들은 항상 하느님 면전에 있을 수 있는 허락을 받았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창조주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삶을 살아가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기뻐해야 합니다.
라자로와 예루살렘으로 인해 흘리신 주님의 눈물에 대해 저는 다음과 같은 말을 더 하고 싶습니다. 그분은 먹고 마셨는데, 꼭 먹고 마셔야만 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필요로 하는 음식과 음료의 양을 우리에게 결정해주기 위해 그렇게 하셨습니다. 이와 마찬가지의 이유로 그분은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분은 자신을 잃어버릴 정도로 눈물을 흘리며 그칠 줄 모르고 울부짖는 사람들에게 명확한 경계선을 그어주고자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우는 행위는 이성에 의해 엄격히 통제되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누구를 위해 눈물을 흘려도 되며, 어느 정도의 강도로 언제 어떻게 울어야 합니까? 주님께서 우신 것은 결코 고통 때문이 아니라 모범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이 이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168)
----------------------------------
에페소 평화 관상 기도의 집
EMTP(Ecology Maria Theotokos Platform)
에페소 평화 관상 기도의 집은 순례와 피정을 통한 에페소 성모님 성지 보존과 중동평화와 생태적 회심을 지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