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배우는 학교 (성프란치스코의 축일에)
내어 주는 만큼 기쁘고, 내려가고 내려놓을수록 풍요로워지고, 허용하고 놓아줄수록 자유로운 신비가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성프란치스코를 통하여 나에게 전달되기까지 존재의 심연에서 겪게 된 내 인생의 변화들이 계절처럼 다가오고 계절처럼 사라져 갔습니다.
일상의 작은 난관들에 빠져 삶 자체가 흔들리던 날 내 주변에는 날 위로해 줄 아무도 없었습니다. 오랫동안 기다려 온 귀한 손님을 대접하려고 음식을 준비했다가 그릇이 바닥에 떨어져 깨져버릴 때 그 음식은 처치 곤란한 쓰레기가 되고 마는 것처럼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발생할 때 가난이 무엇이고 겸손이 무엇인지를 배웠습니다. 내가 웃으면 다른 사람들도 웃으며 다가오고 내가 울 때면 내 얼굴만 젖었습니다. 상실은 삽시간에 오고 치유는 더디게 왔습니다.
내 인생의 계절은 철마다 특별한 은총의 열매들이 풍성하였습니다. 돌이켜보면 아픔과 추위를 견디는 고난의 계절마다 나에게서 내가 해방되는 축복이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하고 놀라운 일이었는가를 알기 때문입니다. 낱알이 여물수록 고개를 숙이는 벼처럼 겸손하고 황송한 안배에 설레는 마음으로 선물 보자기를 하나씩 풀어왔던 흔적을 회상하면서 황혼의 계절을 맞고 있습니다. 아직도 못다 한 말들이 구슬처럼 꿰기를 기다리고 있고, 아름답고 연한 슬픔으로 물든 단풍잎같이 창조주의 얼굴이 나의 얼굴을 통해 반사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생산성에 심취해 있던 내가 성취의 목표를 꼭대기에서 바닥으로 정하기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과 성프란치스코의 가난과 겸손은 사랑이 무엇인지를 배우는 학교가 되어 주었으며, 받아들이고 내어 주는 선의 순환이 남긴 흔적들이 관계를 회복하도록 이끌어 주었습니다. 인간의 모든 가치를 생산성에만 두어 생산성이 없는 이들을 버리는 시대에 허물어진 성과도 같이 폐허의 잔해 속에서 우울하게 죽음을 기다리는 이들이 날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 성숙의 핵심인 깊은 만족, 성취감, 지혜, 기쁨, 평화, 자유는 생산성이나 창조성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성찰과 반성을 통한 내적 작업으로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께서 보여주신 그 길을 따라 “내어 주는 몸”으로서 얻게 되는 것입니다. 반사된 선으로 관계를 이어가는 사람의 얼굴은 기쁨으로 빛납니다. 창조주의 얼굴이 기쁨으로 빛나는 얼굴로 반사되는 것입니다. 도구적 존재로 살아가는 이들의 기쁨은 그렇게 자유 안에서 너에게로 흘러갑니다. 편하고 가벼운 짐은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을 닮고 따르려는 가운데 터득하는 신비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마태 11, 28-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