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끝자락에 와 있는 우리는 부활시기 내내 들었던
사도행전과 요한복음의 마지막 부분을 오늘 들었습니다.
저는 요한복음의 그 아리송하고 지루한 얘기의 반복에 숨이 막히고
이 말씀을 묵상하고 나누는 게 그동안 제게는 고역스런 거였습니다.
여러분에게도 그것이 그대로 느껴졌을 텐데
저의 글을 인내하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제 복음은 베드로 사도의 최후에 대한 예언으로 끝을 맺었습니다.
“네가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그러나 늙어서는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오늘은 주님의 사랑받는 제자가 어찌 될지에 대한 얘기로 시작됩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오늘 복음을 읽다보면 자기의 경쟁자에 대한
베드로 사도의 궁금증이랄까 질투랄까 하는 것이 느껴집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베드로 사도와 주님의 사랑을 받는 제자는 경쟁자입니다.
예수님께서 붙잡혔을 때도 둘이 같이 주님을 따라 가는 것으로 나오지만
베드로는 배반하고 다른 사랑 받는 제자는 십자가 밑에 있었기 때문에
주님께서 어머니 마리아를 이 제자에게 맡깁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이 비어 있음을 알렸을 때도 둘이 달려가는데
사랑 받는 제자가 더 빨리 무덤에 다다랐지만
베드로가 무덤 안으로 들어가 본 것으로 나옵니다.
부활 후 밤새 고기잡이 한 뒤 새벽에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도
주님을 알아본 것은 사랑받는 제자였지만
옷을 걸치고 물에 뛰어든 것은 베드로였습니다.
아무튼 둘은 주님 사랑을 놓고 이런 경쟁자였는데
자기 어떻게 죽을지에 대해 얘기들은 베드로 사도가
주님의 사랑을 받는 제자는 어떻게 죽게 될까 궁금해 묻는 것입니다.
이에 주님께서는 싹둑 잘라서 말씀하십니다.
그가 어떻게 된들 그게 너와 무슨 상관이냐?
그런데 이 말씀은 남이야 죽든 말든 상관치 말고 살라는 말씀이겠습니까?
그렇게 알아듣는 사람은 우리 중에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라고 하시는 말씀은 이런 뜻일 겁니다.
한눈팔지 말고 오직 주님의 십자가 길을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다른 이의 길이 편하더라도 나의 가시밭길을 꿋꿋이 가라는 말씀입니다.
다른 이에게 어떤 일이 주어지든 내게 주어진 일에 충실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 중에는 정말 쓸 데 없는 것에 신경을 쓰고 관여를 합니다.
허나 사랑이 아니라면 그에 대해 신경 쓸 게 무엇입니까?
그의 머리 모양이 어떤 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가 해외여행 다녀온 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가 명품을 가졌다 한들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누가 부귀영화를 누리고 나는 그렇지 못한다 해도
나는 골골한데 그는 나이 먹어서도 건강하다 해도
주님을 따르는 사람에게는 상관할 것이 없습니다.
길을 가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다 지나가는 겁니다.
더욱이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것들은 더 빨리 지나갑니다.
서울 가는 기차를 타면 부산 가는 기차가 휙 지나가는 것과 같은 겁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을 따라 하느님께로 가는 우리에게는
이 세상 모든 것은 다 스쳐 지나가는 것들입니다.
주님을 따라 하느님께 가는 사람만 같이 갈 사람이고
다른 사람, 특히 반대로 가는 사람들은 다 지나쳐갈 사람입니다.
나는 주님을 따르는 사람인지
주님을 따르면서 지나치는 것들에 한눈팔지 않는지 돌아보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