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
오늘 복음은 제가 사랑하는 복음 중의 하나입니다.
같은 내용이 마태오와 루카 복음에도 나오는데
저는 오늘 마르코 복음의 내용을 더 사랑합니다.
믿지만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 달라고 청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두 공관복음에는 이 내용이 없습니다.
“아, 믿음이 없는 세대야! 내가 언제까지 너희 곁에 있어야 하느냐?”
주님께서 이렇게 한탄할 정도로 당시 사람들은 믿음이 없었습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하실 수만 있다면 자기 아이를 고쳐달라고 하여
주님께서 이런 한탄을 하시게 만들었지만 이 아이의 아버지가
이런 말을 하게 한 것은 바로 제자들이었습니다.
아이의 아버지가 예수님이 안 계실 때 먼저
제자들에게 고쳐달라고 하였는데 제자들은 고쳐주지 못하였던 거지요.
그래서 주님도 고치지 못하실지 모른다고 의심을 하였는지,
아니면 말이 헛나왔는지 모르지만 아이 아버지는 주님께 감히
“하실 수 있으면 저희를 가엾이 여겨 도와주십시오.”라고 청합니다.
이에 대해 주님께서 강하게 질책을 하시며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시다.”고 하시자 아이 아버지는
믿지만 믿음이 없는 자기를 도와달라고 청합니다.
믿음을 고백하지만 동시에 믿음 없음도 고백하며 도움을 청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우리이고,
아이 아버지의 신앙 고백과 도움 요청은 우리의 모범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믿음이 있는 것 같으면서도 없고,
없는 것 같으면서도 믿음이 전혀 없지 않습니다.
믿음뿐입니까?
사랑도 그렇지요.
자부하고 자만할 수 있을 만큼의 사랑은 우리에게 없고,
비관할 필요가 없을 만큼의 사랑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여서 자부할 수 있을 만큼의 믿음은 우리에게 없지만
그렇다고 믿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믿음을 얼치기 믿음이라고 혹평을 하고 자학을 할 수도 있지만
긍정적으로 보면 확장성 또는 확장 가능성이 있는 믿음인 것입니다.
왜냐면 믿으면서도 믿지 못하는 믿음은
그 믿음이 작다고 버리지 않는 한 씨앗과 같아서
이 믿음은 계속 자라고 굳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믿음은 어떻게 자라고 굳어집니까?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그리 되겠습니까?
자라고 굳어질 거라고 주문 외듯이 하면 그리 되겠습니까?
완전한 믿음은 없어도 도움을 청할 만큼의 믿음은 있으니
아이의 아비처럼 믿음을 주십사고 청하면 됩니다.
청할 만큼의 믿음에 청하는 갈망만 있으면
주님께서 믿음의 은총을 반드시 주십니다.
믿음의 실패를 통해서도 믿음의 은총을 주시고,
보잘 것 없는 믿음을 통해서도 큰 믿음을 주십니다.
믿음은 실패를 통해서 자라고
작은 믿음이 자라 큰 믿음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