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보통 다른 때는 칭찬받은 종보다는 야단맞은 종이 얘기의 주인공인데
종말에 대해 애기하는 이번 33주일은 칭찬받는 종이 주인공입니다.
한 생을 다 마치고 하느님 앞에 섰을 때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라는 말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칭찬받는 종은 어떤 종인가 보겠습니다.
오랫동안 책임자의 역할을 한 사람들은 누가 잘못했는지,
누가 잘 살고 있는지 눈치로 다 압니다.
뭔가 잘못을 한 사람은 공동체 앞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거나
나와서도 당당하지 못하고 슬금슬금 뒤로 물러섭니다.
그에 비해서 자기 할 바를 열심히 했고 잘 했으면
공동체 앞에 얼굴 내미는 것에 주저함이 없고 당당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쩌다 한 두 번이 아니라
인생 전반적으로 어떤 사람은 매사에 Positive하고,
어떤 인간은 매사에 Negative합니다. 왜 그럴까요?
성격 때문일까요, 아니면 인격 때문일까요?
성격적인 요인도 크지만 인간 성숙의 요인도 큰 것 같습니다.
곧, 오늘 달란트의 비유를 놓고 볼 때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과 달란트를 사랑하는 사람의 차이인 것 같습니다.
성숙한 사람은 자기를 사랑하지만
미숙한 사람은 달란트를 사랑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 인생을 사랑하는데 비해
어리석은 사람은 돈을 사랑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달란트를 사랑하는 사람은 달란트가 많을 때만 자기를 사랑할 겁니다.
그러니 달란트가 적은 사람은 자기를 사랑할 수 없을 것이고,
달란트가 많은데도 적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자길 사랑치 않을 겁니다.
저는 고등학교 때부터 작곡을 하곤 했습니다.
중학교 때까지 음악 교육은 받아본 적도 없는데 고등학교 때
처음 오르간을 만질 수 있게 되면서 작곡이 하고 싶어졌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가르쳐 줄 사람이 없어서 혼자 화성악을 공부했고,
화성학 책이 없어서 성가의 화음을 분석하면서 공부했습니다.
그러다 제가 작곡을 때려쳤습니다.
이유 중 하나는 제가 작곡을 한다고 우쭐거렸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정 반대 이유로 아무리 멋있는 곡을 만들려고 해도
모차르트나 바하와 비교를 하면 너무나 초라했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우월감과 열등감 모두 저를 괴롭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5-6년이 지나 오늘 복음을 묵상하다가 깨달은 바가 있어
모차르트를 생각하면 부끄럽지만 다시 작곡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게 작곡의 달란트가 많이 있는 것도, 또는 누구보다 적은 것도
다 하느님 때문이니 그것이 저의 자랑거리나 우셋거리가 아니지요.
말하자면 저의 작곡 능력은 천부적天賦的인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능력은 다 천부적인 것, 즉 하늘이 준 것입니다.
많은 능력도 하늘이 준 것이고, 적은 능력도 하늘이 준 것입니다.
그러니 능력이 많고 적은 것은 제 탓이 아니고 하느님 탓입니다.
그러나 능력을 가지고 무얼 열심히 했냐, 안 했냐는 제 탓입니다.
성실의 문제이고, 성실은 사랑의 문제입니다.
자기 자신과 자기 인생을 사랑하고,
그래서 자기 일을 사랑하는 사람이 성실하지
능력이 많다고 다 성실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일, 즉 봉사는 하느님 사랑에서 비롯되겠지요.
체면 때문에 또는 등 떠밀려서는 한 두 번 봉사를 할 수 있지만
하느님과 이웃 사랑 없이는 봉사에 계속 성실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 사랑 없이 봉사하겠다고 나서지 말 것이며
“착하고 성실한 종아, 잘 하였다!”는 칭찬받으려 들지도 말 것입니다.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보통 다른 때는 칭찬받은 종보다는 야단맞은 종이 얘기의 주인공인데
종말에 대해 애기하는 이번 33주일은 칭찬받는 종이 주인공입니다.
한 생을 다 마치고 하느님 앞에 섰을 때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라는 말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칭찬받는 종은 어떤 종인가 보겠습니다.
오랫동안 책임자의 역할을 한 사람들은 누가 잘못했는지,
누가 잘 살고 있는지 눈치로 다 압니다.
뭔가 잘못을 한 사람은 공동체 앞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거나
나와서도 당당하지 못하고 슬금슬금 뒤로 물러섭니다.
그에 비해서 자기 할 바를 열심히 했고 잘 했으면
공동체 앞에 얼굴 내미는 것에 주저함이 없고 당당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쩌다 한 두 번이 아니라
인생 전반적으로 어떤 사람은 매사에 Positive하고,
어떤 인간은 매사에 Negative합니다. 왜 그럴까요?
성격 때문일까요, 아니면 인격 때문일까요?
성격적인 요인도 크지만 인간 성숙의 요인도 큰 것 같습니다.
곧, 오늘 달란트의 비유를 놓고 볼 때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과 달란트를 사랑하는 사람의 차이인 것 같습니다.
성숙한 사람은 자기를 사랑하지만
미숙한 사람은 달란트를 사랑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 인생을 사랑하는데 비해
어리석은 사람은 돈을 사랑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달란트를 사랑하는 사람은 달란트가 많을 때만 자기를 사랑할 겁니다.
그러니 달란트가 적은 사람은 자기를 사랑할 수 없을 것이고,
달란트가 많은데도 적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자길 사랑치 않을 겁니다.
저는 고등학교 때부터 작곡을 하곤 했습니다.
중학교 때까지 음악 교육은 받아본 적도 없는데 고등학교 때
처음 오르간을 만질 수 있게 되면서 작곡이 하고 싶어졌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가르쳐 줄 사람이 없어서 혼자 화성악을 공부했고,
화성학 책이 없어서 성가의 화음을 분석하면서 공부했습니다.
그러다 제가 작곡을 때려쳤습니다.
이유 중 하나는 제가 작곡을 한다고 우쭐거렸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정 반대 이유로 아무리 멋있는 곡을 만들려고 해도
모차르트나 바하와 비교를 하면 너무나 초라했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우월감과 열등감 모두 저를 괴롭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5-6년이 지나 오늘 복음을 묵상하다가 깨달은 바가 있어
모차르트를 생각하면 부끄럽지만 다시 작곡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게 작곡의 달란트가 많이 있는 것도, 또는 누구보다 적은 것도
다 하느님 때문이니 그것이 저의 자랑거리나 우셋거리가 아니지요.
말하자면 저의 작곡 능력은 천부적天賦的인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능력은 다 천부적인 것, 즉 하늘이 준 것입니다.
많은 능력도 하늘이 준 것이고, 적은 능력도 하늘이 준 것입니다.
그러니 능력이 많고 적은 것은 제 탓이 아니고 하느님 탓입니다.
그러나 능력을 가지고 무얼 열심히 했냐, 안 했냐는 제 탓입니다.
성실의 문제이고, 성실은 사랑의 문제입니다.
자기 자신과 자기 인생을 사랑하고,
그래서 자기 일을 사랑하는 사람이 성실하지
능력이 많다고 다 성실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일, 즉 봉사는 하느님 사랑에서 비롯되겠지요.
체면 때문에 또는 등 떠밀려서는 한 두 번 봉사를 할 수 있지만
하느님과 이웃 사랑 없이는 봉사에 계속 성실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 사랑 없이 봉사하겠다고 나서지 말 것이며
“착하고 성실한 종아, 잘 하였다!”는 칭찬받으려 들지도 말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세 번씩이나 거듭 거듭 물어가며 그러셨습니다.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떼를 돌보아라"
사랑없이는 봉사하겠다고 나서지 말라는 신부님 말씀위로
우리 주님의 말씀이 조용히 겹쳐집니다.
프란치스칸의 또 하나의 사랑을 느끼게 되어서 감사드립니다.
우리 형제 독창회 뒷바라지 하느라 더 늦게 올리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 형제 독창회를 풍성하게 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