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에페소 평화기도 다락방 말씀 기도
2023년 10월 27일 금요일
교부들의 말씀 묵상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재판관에게 갈 때, 도중에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 그러지 않으면 그가 너를 재판관에게 끌고 가, 재판관은 너를 옥리에게 넘기고 옥리는 너를 감옥에 가둘 것이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루카 12,58-59)
그 재판관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말고 다른 재판관은 알지 못합니다. 그분에 관해 성경은 이렇게 말하지요.
“모든 민족들이 사람의 아들 앞으로 모일 터인데, 그는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가를 것이다. 그렇게 하여 양들은 자기 오른쪽에, 염소들은 왼쪽에 세울 것이다”(마태 25,32-33).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마태10,32-33).
-오리게네스-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엑카르트 시대와 우리 시대
4. 절망감 죄책감 종말 의식:
터치맨은 다음과 같이 비평한다. “제네바의 로베르를 성 베드로의 권좌에 앉힌 것은 다름 아닌 극도의 이기심과 냉소주의다. " 시에나의 카타리나는 이 옹립에 대해 이렇게 외칠 수밖에 없었다. “이기심이라는 독이 세계를 파괴하고 있다." 종말을 예언하는 연극들이 종말을 다룬 우리 시대의 영화만큼이나 많이 상연되었다. 사회와 정신의 불안정은 멸망과 허무를 예견했고, 연극은 그러한 멸망과 허무를 잘 그려 보였다. 이 시대를 관찰했던 한 사람은 그러한 파멸의 알을 낳은 사회적 상황에다 죄를 뒤집어씌웠다. 펴렌체의 지오반니 빌라니는 인간이 인간에게 무자비했기 때문에 흑사병이 발병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죄는 “가난한 사람들을 억압했던 탐욕과 고리대금이었다. 가난한 자들의 처지에 대한 동정과 분노를 표출한 자들은 그 시대의 작가들과 그 세기의 양심 있는 자들이었다.”
이 네 동향은 참혹한 시기를 떠받치는 기둥이었다. 엑카르트는 그 시대를 겪었고, 시대에 영향을 주고자 온 힘을 기울였다. 그는 수도승으로 살지 않았다. 그는 이러한 격변기 한복판에서 살았고, 프랑스에서는 학자로,독일에서는 설교자로, 보헤미아에서는 주교 대리로 활동했다. 터치맨은 그 시대의 정신을 이렇게 요약한다. “난폭하고, 괴롭고, 당혹스럽고, 고통스러운 붕괴의 시대였다. 많은 사람이 그 시대를 사탄이 승리한 시대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당시를 오늘날과 비교한다. “우리는 지난 10년, 20년 사이에 가설들이 무너지는 아픔을 겪었다. 이 시기는 유례없는 불안의 시기였다. 하지만 인류는 과거에 이보다 훨씬 나쁜 시기를 살았다. 이 사실을 안다면 다시 용기를 내게 될 것이다" 라이너 쉬르만은 격변하는 사회의 한복판에서 엑카르트가 떠맡은 설교자로서의 사명을 이렇게 요약한다.
”설교는 액카르트가 선택한 문학 형식이다. 그가 설교자로 살았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 그의 설교는 우리의 자유를 꼬드겨, 기존의 존재 내지는 피조물의 무에서 곧 도래할 존재 내지는 신성의 무에 이르는 길을 내라고 촉구한다. 사람들은 그의 설교 자체에서 장차 나타날 존재를 만났다.“
이처럼 시대가 엑카르트를 만들었고, 엑가르트는 능력껏 시대에 영향을 미쳤다. 터치맨이 믿은 대로 엑카르트가 살던 시대와 우리 시대가 같은지 아닌지는 독자들의 판단에 맡기겠다.(43)
에페소 평화기도 다락방 10월 4주간
금주간 성서읽기 2코린 8-13장 / 1테살 1-2장
금주간 생태 행동
<생태 영성 주간>
생태 지향 : 고요와 침묵과 절식을 통한 단순한 삶
개인 혹은 공동체 차원에서 먼저 하루를 정해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금요일 성인의 날
영적 삶의 샘(디다케에서 아우구스티노까지), 요한 봐이스마이어 외 지음
체사레아의 바실리오
감사에 대한 강론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여러분은 이와 반대로 슬픈 노래들을 우는 구실로 삼아 잘못 사용하고, 여러분의 정서를 그 슬픈 노래들에 맞추곤 했습니다. 연극을 하는 배우들이 무대에서 특별한 의상을 입듯이, 여러분은 슬픈 사람들을 위해 특정한 자세를 요청합니다. 슬픔의 상처를 더 바라볼 수 있도록 검은 색깔의 옷을 입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아무런 희망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나 행하도록 둡시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숨을 거두신 분께서 가르치셨습니다.
“썩을 몸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약한 자로 묻히지만 강한 자로 다시 살아납니다. 육체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1코린 15,42-44).
단지 옷을 바꾸어 입기 위해 떠난 사람을 위해 울어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여러분은 이 세상살이에서 마치 협조자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울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성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야훼께 몸을 숨기는 것이 귀족을 의지하는 것보다 더 낫다”(시편 118,9).
마치 그가 엄청난 불행을 당한 것처럼 울지 마집시오. 짧은 시간이 흐르고 나면 하늘의 나팔소리가 그를 깨워 일으켜 세울 것이고, 여러분은 그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다음과 같이 소리치는 것을 중단하십시오.
“생각지도 않았던 얼마나 큰 불행인가! 누가 이것을 생각할 수나 있었겠는가? 내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려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으면 우리는 얼굴을 붉혀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나간 과거와 현재왜 경험이 우리가 이러한 악들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기 때문입니다.(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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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페소 평화 관상 기도의 집
EMTP(Ecology Maria Theotokos Platform)
에페소 평화 관상 기도의 집은 순례와 피정을 통한 에페소 성모님 성지 보존과 중동평화와 생태적 회심을 지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