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
내 지체 안에는 다른 법이 있어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고 있음을 봅니다.
그 다른 법이 나를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수도원에 들어와 프란치스코를 안 다음 저는 프란치스코 때문에 늘 괴로웠습니다.
제게 프란치스코는 정말 너무나 위대하고 완벽한 인간이었고
그래서 저는 어떻게든지 그를 닮으려고 했습니다.
먹는 것도 그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프란치스코는 단식을 밥 먹듯이 했을 뿐 아니라
먹을 때도 맛을 없애려고 물을 타서 먹든지 재를 타서 먹었으며,
갈증이 날 때도 물조차 다 마시지 않고 갈증을 해소치 않았습니다.
그러니 저는 배불리 먹으면 배불리 먹어서 괴로웠고,
배를 채우지 않고 조금 먹으면 배고파서 괴로웠지요.
맛있는 것이 나올 때는 더 괴로웠습니다.
프란치스코는 맛을 없앴는데 맛이 있으니 맛있어서 괴롭고,
그 맛있는 것을 먹지 않을 때는 먹지 못해서 괴로웠습니다.
욕구/본능의 나와 이성/의지의 나 사이에서 늘 갈등이었고 늘 괴로웠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상적인 나와 현실의 나 사이에서 늘 괴로웠습니다.
이상은 하늘을 향하고 집착하는데 현실은 땅바닥에서 기었습니다.
사랑하고 싶고, 사랑하려는 마음도 있는데 미움이 늘 옆에 있고,
좋아하는 것 옆에는 늘 악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바오로 사도가 한탄하듯 그런 제가 비참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오늘 이렇게 한탄하지요.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그런데 누가 비참한 인간입니까?
바오로 사도입니까? 아니면?
갈등이 없고 비참함을 모르는 사람이 비참합니다.
욕망과 본능에 따라 살면서도 아무 갈등이 없고 괴로움이 없는 사람,
그리고 그런 자기가 비참한지도 모르는 사람이 실로 비참한 사람입니다.
그의 말로가 비참하고,
하늘에서 비참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기의 비참함을 아는 사람은 구원을 청하지요.
나로서는 안 되니 하느님께 은총을 청하고 구원받게 됩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도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주신 하느님께 감사 드립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비참함을 아는 나,
은총을 청하는 나,
그래서 구원을 받을 줄 아는 내가 오히려 복됨을 알아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