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더 내세의 희망을 지니고 있을까?
누가 더 내세의 희망을 간절히 바랄까?
이 세상에서 고통이 없고 행복한 사람일까?
그 반대의 사람일까?
틀림없이 이 세상에서 고통이 없고 행복한 사람은
이 세상 행복이 지속되기를 바라지 내세의 희망을 바라지 않을 것입니다.
반대로 이 세상 삶이 고통뿐이고 행복이 도대체 뭔지 모르는 사람은
이 세상이 빨리 끝나길 바랄 것입니다.
이는 이번 시합에서 패색이 짙은 사람이 이번 시합은 빨리 포기하고
다음 시합이나 이길 것을 희망하며 준비하는 것과 같은 것일 겁니다.
그런데 고통뿐인 사람이 이 세상이 빨리 끝나길 바라는 것은 틀림없지만
이들 모두가 내세 희망을 바라고 더 간절히 바랄지,
이에 대해서는 모두가 다 바라고 더 바라는 것은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느님 사랑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하느님 사랑은커녕 하느님 존재에 대한 믿음도 없는 사람은,
하느님으로 인한 내세의 희망을 도저히 가질 수가 없겠지요?
사실 하느님을 믿는 사람도 고통이 너무 오래가면
하느님 사랑을 의심하다가 아예 불신케 되고 희망도
꺾이곤 하는데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오죽하겠습니까?
그런데 하느님 없는 내세가 있겠습니까?
있다고 한들 그런 내세를 우리가 희망하겠습니까?
하느님 없는 내세를 우리가 살아낼 수 있을 것이며
그리고 살아낼 수 있다고 한들 왜 삽니까?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우리 믿음의 근거이고,
믿음은 우리 희망의 근거입니다.
아니, 이렇게 얘기해야겠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 믿음의 근거이고,
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이 우리의 희망의 근거입니다.
비록 하느님이 보이지 않을지라도.
특히나 고통 속에서는 하느님이 보이지 않고,
더 정확히 얘기하면 지속되는 고통 속에서는 하느님의 사랑이 보이지 않을지라도.
하느님과 하느님 사랑이 보이지 않는다고 당황하거나 희망을 빨리 포기하지 않고,
지속되는 고통과 고통의 어둠을 관조하고 오래 관상하면,
마치 어둠이 오래되면 어둠 속에서도 보게 되듯 하느님 사랑이 차츰 보일 것이고,
바오로 사도가 얘기하듯 그렇게 희망하며 인내심을 가지고 내세를 기다릴 겁니다.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