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된 지식은 기쁨에 찬 가난과 겸손으로 얻게됩니다.
가난을 내려가는 일과 내려놓는 일로, 겸손을 허용하는 일과 놓아주는 일이라고 해석하고 있는 내가 객관화된 지식이 아니라 경험된 지식으로 말하기까지는 내 삶의 기초를 흔들어 놓을 만한 영의 현존과 영의 활동이 있었음을 발견했습니다. 내려가는 일과 내려놓는 일은 나에겐 죽음의 시간이었고 그 죽음 없이는 내려갈 수 없었습니다. 내려가고 내려놓을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신 분으로부터 사랑받고, 보호받고, 그 사랑에 의하여 내려갈 마음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나는 고마움과 감사를 넘어 놀라움이 얼마나 컸던지 내 안에 더는 담을 수 없는 비좁은 나의 내면을 보았습니다. 진리에 대한 충격, 선에 대한 충격, 아름다움에 대한 충격과 부드럽고 온유함의 충격으로 육화의 겸손을 느꼈으며, 육화의 겸손은 나와 동등해지기 위하여 하느님의 동등성을 포기하신 하느님의 가난을 발견하였기 때문에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육화가 담고 있는 그 사랑의 깊이가 삼위일체 하느님의 내어주시는 사랑으로 나에게 다가왔습니다. 허용하시는 하느님, 놓아주시는 하느님으로부터 하느님의 겸손을 발견하였고 그로부터 내려가는 사랑과 내려놓는 사랑이 얼마나 아름다운 사랑인가를 알게 된 것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와서 배워라. 내가 주는 멍에는 편하고 내가 주는 짐은 가볍다.”
내려가고 내려놓고 허용하고 놓아주는 사랑은 죽음과 부활의 신비가 무엇인가를 가르쳐 줍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서 요구되는 동등성은 꼭대기에 살고 있는 나를 내려오게 하는 거울이었습니다. 사랑은 내려갈수록 아름답습니다. 사랑은 내어줄수록 커집니다. 사랑은 내려놓을수록 올라갑니다. 사랑은 허용할수록 자유로우며 놓아줄수록 여유롭습니다. 관계의 혁명을 불러오게 하는 내어주는 사랑이 삼위일체 하느님 사랑이었습니다. 해방과 자유와 기쁨의 순간들이 내 마음에 깊은 흔적을 남겨놓았습니다. 인간의 자유는 사랑하기 위하여 사용될 때 가장 위대합니다. 관계 안에 하느님의 자비와 선하심이 서로의 가슴에 흔적을 남겨놓기 때문입니다. 관계 안에 현존하시는 분을 발견하는 내적 경험이 머리로 아는 지식을 가슴으로 알아듣게 합니다.
하느님의 신비를 경험하는 순간들은 나에게서 내가 해방되는 자유를 경험할 때 기쁨으로 빛납니다. 새로운 자유를 경험하는 것이 하느님을 만나는 체험이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기대를 훨씬 넘어 계신 분을 인과응보의 틀에 가두는 어리석음을 더는 되풀이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과 다르다.”하고 말씀하십니다. 순수한 하느님 체험으로 나아가지 않는 믿음은 나를 중심으로 자만심만 키우는 종교적 광신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그 많은 기도와 희생들은 하느님을 체험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나를 우월하게 만들고 스스로 거룩하다고 믿게 만듭니다. 열심히 교회에 나가고 기도와 전례에 참석하고 성체를 영하고 묵주기도의 양을 늘리고 희생을 셈해도 관계 안에 하느님의 자비와 선이 흐르도록 하지 못한다면 자신의 신앙을 의심해 봐야 합니다. 그리고 가짜라고 판명되면 멈추고 돌아가서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의 회개는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는 그러한 과정을 반드시 거처야 합니다.
순수하게 하느님을 경험하게 되면 새처럼 자유로워져서 다른 방식으로 사람들을 대하게 만듭니다. “사람에게 자유를 주는 법”으로 더 사랑스러워지고, 더 깨끗하고 정직해져서 더 견디고, 더 기다려 주며 더 자비로워져서 품으로 길러내는 사랑이 됩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선에 참여하는 기쁨은 그렇게 마음에서 마음으로 얼굴에서 얼굴로 가슴에서 가슴으로 번져나갑니다. 도구적 존재로 살아가는 이들의 기쁨이 커지면 하느님 나라가 미래에 있지 않고 현재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선물로 다가오시는 하느님은 숨어계신 하느님이 아니라 보이는 하느님으로 나에게 다가오십니다. 너와 피조물을 통하여 나에게 다가오십니다. 내가 서 있는 땅과 강과 바다와 숲에서 살아 숨 쉬는 모든 생물과 무생물까지 서로를 내어주면서 반사된 선으로 낙원에서 누리는 잔치의 기쁨을 얼굴에 담고 나에게 다가옵니다. 해와 달과 별들과 온갖 초목, 동물과 새들, 꽃과 과일과 씨, 눈에 보이는 모든 생명이 저마다 하느님 사랑을 담고 나에게 다가오고 있음을 오감으로 경험합니다. 보고, 듣고 향기를 맡고, 맛보고, 만지는 촉감으로 하느님을 만납니다. 부드럽고 따뜻하고 다정한 촉각, 안전하고 넉넉하며 푸근하고 섬세한 손길, 아버지의 자비와 선하심과 좋으심을 느낌으로 알게 합니다. 눈이 열려 보게 하시고, 귀가 열려 듣게 하시며, 향기와 맛으로 당신을 보여주십니다.
깨닫고 깨어나서 깨어있는 삶이 여백을 만들고 그 여백에 하느님과 너와 피조물을 담을 때 인간은 황홀경을 경험합니다. 알지 못하기 때문에 신비로 말하는 게 아니라 너무 많고 다양하고 풍성해서 신비로밖에 설명할 수 없기에 신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과 마음의 여백뿐 아니라 품어낼 여백은 언제나 나의 죽음 뒤편에서 마련됩니다. 나에게서 내가 죽는 그 죽음의 순간들이 영이 활동할 여백을 만듭니다. 영의 활동을 통해 내려가게 하고 내려놓게 하며 허용하고 놓아주도록 나에게 영감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죽음과 부활의 신비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에게 육화의 겸손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받는 기쁨이 만든 가난은 기쁨에 찬 가난이 되고 내어주는 기쁨이 만든 겸손은 구원하는 고난을 받아들입니다. 구원은 인간의 업적과 공로에 대한 하느님의 보상이 아니며 힘으로 얻는 행복도 아닙니다. 구원은 내어주는 사랑으로 관계를 회복하게 하고 서로를 밝혀주는 과정에서 경험하는 신비입니다. “너희는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주는 나의 몸이다.” 내어주시는 몸을 받아 모신 우리는 내어주는 사랑으로 응답합니다. 내어주는 사랑으로 응답하지 않는 신앙은 신앙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