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 - 변화의 내적 움직임
내가 변하면 하느님이 나를 사랑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면 내가 변하게 됩니다.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시기에 내가 바뀔 수 있습니다. 변화를 일으키는 동기를 살펴보면, 바뀌고 싶은 마음을 먹게 하는 것은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이라기보다 사랑받고 사랑하는 경험입니다. 먼저 움직이시는 분은 언제나 하느님이십니다. 사랑받고 사랑하는 경험이 변화의 에너지를 공급합니다. 나로 가득 차 있을 때 그분의 움직임을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가난은 영의 활동을 받아들일 여백을 만듭니다. 잘 지키고 많이 바치면 하느님이 그에 대한 보상으로 나를 사랑해 주실 것이라고 배웠지만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고 있음을 아는 만큼 내적 움직임이 너를 향하도록 이끌어 주신다는 말입니다. 하느님 자비의 호수에 빠져 본 경험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너그러운 마음으로 너를 대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바쳐서 얻는 구원이 아니라 받아서 누리는 구원입니다. 변화의 내적 움직임은 내가 아니라 하느님이십니다. 나로부터 출발하면 영의 활동을 가로막습니다. 내가 가졌다고, 내 것이라고 여기는 것들은 다 받은 것입니다. 어느 것도 내 것이라고 주장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성프란치스코께서는 내 것이라고는 “악습과 죄”밖에 없다고 하셨습니다. 받은 사랑에 성실한 것 자체가 희망과 가능성을 열어줍니다. 나의 내면에 있는 선은 업적과 공로로 보상받은 선이 아니라 무상으로 받은 선입니다. 무상으로 주어진 선에 정직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타인이 이룬 성과까지 자기 것으로 만들어 지배하려는 욕구가 쉬지 않고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무상으로 받은 선이란 우리가 처음부터 지닌 “우리와 비슷한 사람을 만들자” 하느님을 닮은 존재가 되라는 허락입니다. 나를 따라오라고 손짓하시는 그분을 알아보는 표시는 외부에 있지 않습니다. 내면에서 일하시는 영의 활동에 내 몸이 말을 잘 듣게 함으로써 하느님께서 육화의 실재를 경험하게 하십니다. 어머니가 새로 태어난 아이를 끊임없이 지켜보는 것처럼 우리가 영적인 걸음마를 시작할 때 그분께서는 나의 요구를 채워주셨습니다. 아이의 필요성은 성장하면서 변합니다. 모든 성장이 변화를 위한 관계의 필요성으로 나타납니다. 지금 바로 그 필요성을 채우는 것이 사랑의 마지막 법입니다.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이들의 필요성을 외면하면 둘 다 성장을 멈춥니다.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신학과 이념은 필요성을 외면하고 신학과 이념에 갇혀버리게 합니다. 그렇게 되면 긴박한 몸의 요구들이 배고픔으로 나타나는 인간적 결핍에 구체적으로 다가갈 수가 없습니다.
지혜로운 사람들은 아래로부터 깨닫기 시작하지만, 어리석은 이들은 위로부터 찾다가 결국 포가하고 맙니다. 왜냐하면 필요성을 몸으로 채우기보다 기도로만 채우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만병통치약처럼 사용하고 자신이 몸을 숙여 돌보는 일은 하느님께서 하실 일로 만듭니다. 우리가 매번 드리는 주님의 기도는 그 자체로 지향이 있지만 주님의 기도를 다른 지향을 두고 마치 하느님과 거래하듯이 기도하는 모습을 자주 봅니다. 그러나 아래로부터 필요성을 채우면서 기도하는 사람은 몸을 사리지 않습니다. 말로만 기도하지 않고 곁에 있는 이들의 필요에 민감하게 대처합니다. 자신을 내어주는 그 현장에서 영의 현존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지금 자신이 하는 일이 내가 하는 일이 아니라 주님의 영께서 하시는 일로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변화의 내적 움직임을 안에서 발견하는 사람은 정말로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기도가 몸을 움직이도록 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