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오늘 질문으로 강론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엄마가 자녀의 사랑을 더 원할까요?
자녀가 엄마의 사랑을 더 원할까요?
하느님이 우리의 사랑을 더 갈망하실까요?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더 갈망할까요?
엄마와 하느님이 더 원하고 갈망하시는데
그것은 더 큰 사랑이 더 원하고 갈망하기 때문입니다.
갈망을 기준으로 하면 이렇게 되는데
필요를 기준으로 하면 어떻게 될까요?
엄마가 자녀의 사랑을 더 필요로 하지 않고 자녀가 엄마의 사랑이 더 필요로 하고,
하느님에게 우리 사랑이 더 필요치 않고 우리에게 하느님의 사랑이 더 필요하지요.
이와 관련하여 연중시기 감사송은 이렇게 아름답게 노래합니다.
“아버지께는 저희의 찬미가 필요하지 않으나
저희가 감사를 드림은 아버지의 은사이옵니다.
저희 찬미가 아버지께는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으나
저희에게는 주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 도움이 되나이다.”
그렇지요. 엄마의 사랑이 없으면 곧 엄마가 밥해주지 않고 빨래해주지 않고
학교 보내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기에 엄마의 사랑이 더 필요한데
그런데도 자식은 종종 엄마의 사랑은 무시하며 애인의 사랑을 더 갈망합니다.
이것이 오늘 연중 제32주일이 얘기하는 어리석음입니다.
그래서 오늘 연중 제32주일은 우리에게 두 가지 지혜에 관해 얘기합니다.
첫째는 하느님의 사랑이 더 간절하기에 우리가 하느님을 찾아 나설 필요가 없고,
집에서 이미 문 앞에 와 계신 하느님을 기다리면 된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오늘 독서 지혜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지혜는 자기를 갈망하는 이들에게 미리 다가가 자기를 알아보게 해 준다.
지혜를 찾으러 일찍 일어나는 이는 수고할 필요도 없이
자기 집 문간에 앉아있는 지혜를 발견하게 된다.”
그러니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를 찾아오는 더 큰 사랑을 앉아 만나지 않고,
오히려 사랑이 작기에 찾아오지 않는 사랑을 찾아 여기저기 돌아다닙니다.
늘 가까이 있는 엄마의 더 큰 사랑은 제쳐놓고
엄마보다 훨씬 보잘것없는 다른 사랑을 찾아 여기저기 헤매고,
늘 가까이 계시고 우리 자신보다 더 가까이 계신 하느님 사랑은 놔두고
멀리 있고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찌질한 사랑을 찾아 방황합니다.
시편과 신명기의 주님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당신을 진실하게 부르는 모든 이에게 가까이 계신다.”(시편 145, 18)
“우리가 부를 때마다 가까이 계셔주시는,
주 우리 하느님 같은 신을 모신 위대한 민족이 또 어디에 있느냐?”(신명 4,7)
그러므로 위대한 족속은 우리 이웃보다 가까이 계시는,
아니 나 자신보다도 더 가까이 계시는 위대한 하느님을 알아보고,
태양으로 계시는 하느님, 바람결에 다가오시는 하느님,
집 짓는 자들이 버린 돌처럼 널브러져 있는 하느님을 알아봅니다.
다음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복음의 비유에서 얘기하는 슬기로운 처녀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찾아오시어 거리와 장소적으로 가까이 계시는 분일 뿐 아니라
시간적으로도 언제고 찾아오시는 분이시고 그래서 불시에 찾아오시는 분입니다.
저는 불시에 오시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불시(不時)란 말이 어떤 뜻입니까?
때가 아닌 때라는 말이고 내 때가 아닌 때라는 말이 아닙니까?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오시지만 그때가 내가 정한 때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정하신 때에 오십니다.
그 하느님의 때에 늘 그리고 언제나 준비하고 깨어 있는
지혜로운 우리가 되라고 가르침을 받는 오늘 우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