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오늘 복음은 죄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얘기하면 남을 죄짓게 하는 나의 죄와
나에게 지은 남의 죄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입니다.
그런데 오늘 가르침을 보면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두 가지를
말씀하시는 것이 상당히 인상적입니다.
우리는 보통 남이 내게 죄를 지었을 경우
그 죄를 용서하는 것만 생각하거나 거기에 초점을 두는 것이 보통이지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용서하기 전에 꾸짖는 것에 대해서도 말씀하시고
남이 내게 지은 죄를 꾸짖기 전에 내가 그에게 지은 죄를 보려고 하는데
그것 말고도 남을 죄짓게 하는 나의 죄에 대해서도 보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직접 지은 죄에 대해서만 반성하기 쉽습니다.
아니 그것조차 알아채지 못하거나 알아채더라도 인정하려고 들지 않기에
그것을 알아채고 인정하는 것만이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겨우 애씁니다.
그런데 부지불식간에 남을 죄짓게 하는 죄도 있으니
그 죄도 놓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저는 두 단어 ‘부지불식간에’와 ‘조심’에 대해 유의합니다.
‘부지불식간에’란 알지 못하고 의식하지 않는 사이란 뜻입니다.
우리는 내가 무심코 한 말이 남을 죄짓게 한다는 것을 모르고,
내 행위가 남을 죄짓게 하는 죄라는 것을 아예 모르기 쉽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조심하라는 것인데
조심(操心)이란 방심(放心)의 반대말로서 ‘操’자가 ‘잡다’ 또는 ‘쥐다’는 뜻이니,
방심하지 않고 곧 마음을 놓지 않고 마음을 다잡거나 꽉 움켜쥔다는 뜻이지요.
아무튼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남을 죄짓게 할 수 있음에 대해
방심하지 말고 조심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용서 못지않게 꾸짖는 것도 해야 하고 잘해야 합니다.
사실 용서하는 것도 쉽지 않지만, 꾸짖는 것이 실은 더 쉽지 않고,
잘 꾸짖는 것은 더 쉽지 않기에 우리는 꾸짖지 않으려고 하기 쉽습니다.
더욱이 나도 죄를 짓는 놈인데 하는 생각이 들면 주님 말씀처럼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의 티를 빼주려는 것만 같겠지요.
그렇기에 우리가 남의 죄를 감히 꾸짖기 위해서는
겸손과 사랑에서 비롯된 더 큰 용기가 필요합니다.
거듭 말하지만 용서하는 것보다 꾸짖는 것이 더 어렵고
그래서 어쩌면 더 큰 사랑이고 그래서 용기가 필요합니다.
사실 용서하는 것은 용기를 낼 필요까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꾸짖는 것은 용기를 내야 하고
반드시 겸손과 사랑에서 비롯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 많은 기도 뒤에 꾸짖어야 할 것입니다.
그에 대한 사랑이 내 마음 안에 차오르도록 기도하고,
내가 꾸짖거나 충고할 때 그가 받아들일 마음이 생기도록 기도한 뒤에.
이런 준비를 거쳐서 잘 꾸짖는 사람은 용서는 식은 죽 먹기일 것이고,
용서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용서는 이미 이루어져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렇게 꾸짖으라고 하셔도
저는 감히 꾸짖을 사람은 못되고 충고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용감히 꾸짖으라시는데 저는 감히 그러지 못하겠다는 오늘 저입니다.
사랑이 많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