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32주 화요일-2019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어 어떠한 고통도 겪지 않을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의 눈에는 의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고 그들의 말로가
고난과 파멸로 여겨지지만 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다."
오늘 지혜서를 보면 '어리석은 사람의 눈에는'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어리석은 사람의 눈에는 지혜로운 사람의 눈에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우리말에 혜안이라는 표현이 있고
그 사람은 혜안이 있다는 말도 있는데
혜안이라는 말이 바로 지혜의 눈을 말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인도 사람의 미간과 부처님의 미간에 있는 점과 보석이
바로 이 혜안을 뜻하는 것인데 두 눈으로만 봐서는 안 되고
이 지혜의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 그 안에 있습니다.
실로 지혜의 눈을 가진 사람은 두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어리석은 사람의 두 눈은 보이는 것만 보지만
지혜의 눈은 보이는 것 너머를 보고 꿰뚫어 보기 때문입니다.
우선 어리석은 사람의 눈은 죽음밖에 볼 수 없지만
지혜로운 사람의 눈은 죽음 밖에 있는 생명을 보고
그래서 죽음 앞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불사의 희망을 지닙니다.
이 얘기는 죽음의 안과 밖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의 안을 보면 죽음만 보이지만
죽음 밖을 보면 죽음이 아닌 생명도 보이는데
어리석은 사람의 눈은 죽음만 보고 죽음 밖은 볼 수 없지만
지혜로운 사람의 눈은 죽음 밖의 생명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고통 또는 시련을 보는 눈도 다릅니다.
역시 어리석은 사람의 눈은 고통을 시련으로만 보지만
지혜로운 사람의 눈은 고통을 단련으로 봅니다.
다시 말해서 시련은 고통밖에 없는 것이고 그래서 고통은 곧 불행이지만
단련은 고통이 우리를 단단하게 하고 성장하게 하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를 행복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시련은 당하는데 비해 단련은 스스로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시련은 수동적인데 비해 단련은 능동적인 것이며,
설사 단련을 스스로 하지 않고 받더라도 의미를 알고 단련을 받습니다.
그런데 지혜에도 등급이 있습니다.
인간적인 지혜와 영적인 지혜의 차이가 있다는 뜻입니다.
인간적인 지혜는 고통을 단련으로 보고 고통 안에서 증강增强의 씨앗,
곧 고통을 통해 더 강해지고 성장할 것이라는 것만을 본다면
영적인 지혜는 고통 너머에서 하느님을 보고
더 나아가서 고통을 통해서 우리를 단련시키는 하느님의 사랑까지 봅니다.
그래서 영적인 지혜를 지닌 사람은 용광로 속의 금처럼 불로 단련을 받아
하느님께 맞갖은 아들이 되고 하느님과 함께 사랑 속에 살 것이라고,
그것은 하느님께서 이들에게 은총과 자비를 주시기 때문이라고
오늘 지혜서는 얘기합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지혜가 고통 속에서 하느님과 사랑과 행복을 보게 하는 면도 있지만 고통이 이런 지혜를 갖게 하는 측면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상호적인 측면, 곧 고통이 지혜롭게 하고
지혜가 고통을 사랑과 행복으로 보게 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니 고통을 겪지 않은 사람은 지혜를 얻기 힘들고,
영적인 지혜는 더더욱 얻기 힘들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오, 지혜롭게 하는 고통이여!'라고 고백하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