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당신의 마음가짐과 자기 대화의 힘에 더 조율되기
우리의 성격, 인지들(예, 생각 방식, 지각, 이해) 그리고 자기 대화를 통해, 우리는 고통이나 기쁨을 찾는다고 심리학은 우리에게 가르친다. 영성은 이 이해에 맥을 같이하고 이것을 더 깊은 의미로 인도한다. 자기 대화에서, 만약 우리가 듣는 목소리가 하느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이나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라는 깊은 의식에 의해 영감을 받는다면, 우리는 판단이 아닌 초대라는 느낌을 받는다. 우리의 자기 대화는 희망을 키울 것이고, 우리가 필요한 도전을 직면하도록 하며, 모든 것에 대해(힘든 순간에 우리 자신을 포함해서) 공감하도록 도울 것이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와 결혼한 마르타 겔혼은 이런 말을 했다고 캐롤라인 무어헤드가 그의 책 ‘겔혼’에서 전한다. “나는 사람들이 자기 머릿속에서 자기를 향해 격노하는 불행들에 넋을 잃었다.” 잭 콘필드는 여기에 개인 내적 양성과 연관된 것을 덧붙이며 말한다.
우리가 명상이나 기도로 우리 마음을 고요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우리 삶의 얼마나 많은 것이 무의식적인 이야기에 의해 지배받는지 알 수 있다. … 우리는 내적 대화의 주제들을 보기 시작하는데, 이 주제들은 야망과 무가치함, 불안정함과 희망, 자기 증오와 자기 성장일 수 있다. 이 이야기들은 우리의 개인적이거나 문화적인 조건화를 반영한다. 우리가 말하는 이야기의 중심적인 것은 우리가 자신에 대해 가지는 고정된 생각들이다. 이런 생각들과 가정들은 너무나 강력하기에, 우리는 이 에너지에 의해 거듭거듭 살아간다. … 훌륭한 영적 훈련은 이 이야기들의 정체를 드러내어 이야기들의 제한적 신념들을 드러낸다. 우리는 이것들이 가장 근원적인 사실이 아님을 배우게 된다.
수 년 전에 내가 나의 책 Seeds of Sensitivity에서 말한 대로 우리가 하루를 지내며 올바른 자기 대화를 하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만 해당되지 않는다. (우리는 자기 대화를 성찰하며 우리가 다른 이 탓으로만 투사하지 않도록, 자신에 대해 비난하지 않도록, 그리고 비현실적이 되어 낙담하지 않도록 하기에) 우리가 일단 자기에 대한 더 올바른 감각을 가지면, 우리는 더 자유로워질 수 있고 더 통합적인 이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자기에 대해 민감하듯이 모든 이에 대해서도 민감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에너지를 모아 인격체로 성장하도록 도울 것이다. 우리는 하루 동안 자신에 대해 말하는 가운데 부정확한 것들에, 심지어 과장된 것들에, 쏟는 에너지 낭비를 막을 것이다.
우리가 올바르게 상황을 바라보고 우리 안에서 그 상황들을 판단함 없이 숙고하면, 여기서 자기에 대한 진정한 감각이 생긴다. 이 감각과 함께 우리는 더 확실하고 겸손한 감각을 가지고 상황에 접근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인정이나 칭찬을 찾기보다, 우리 자신의 더 진정한 정체성에 따라 행동하고 우리 재능과 성장에 대한 더 큰 자기 앎을 향해 행동한다.
우리가 걱정하고 우울하고 스트레스을 받고 있다고 느낄 때, 우리가 (하느님 안의) 자신의 중심적인 정체성을 접촉하도록 할 질문들을 자신에게 던질 수 있다. 그러한 질문들은 우리의 두려움이나 “불편한 감정의 병”이 어떤 역할을 하려고 하기 때문에, 자신이 거부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혹은 자신이 허풍장이나 나쁜 이로 어떤 식으로 드러나는 것 때문에 일어남을 알도록 돕는다. 이 질문들은 평정심을 가지고 익숙하지 않은 것과 익숙한 것을, 매력적이지 않은 것과 매력적인 것을, 위안되는 것과 도전되는 것을 우리가 대면하도록 할 것이다. 이런 대면이 일어날 때, 우리는 불필요하게 우리 자신을 과장하거나 경시하지 않게 된다. 우리는 모든 상황에서 배움을 추구할 것이고, 방어나 공격을 위해 많은 에너지를 사용하지 않음에서 오는 자유로움을 느낄 것이다. 우리는 다른 이가 보는 우리의 이미지를 덜 걱정할 것이고 심지어 우리가 자신에 대해 가지는 이상적 이미지에 대해서도 덜 매일 것이다. 우리는 단순히 하느님의 친구가 되는 것에 더 집중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너희를 벗이라 부른다”(요한 15,5).
첨언)
저자의 하느님 안의 정체성을 찾는 자기 대화에 이야기를 들으며 프란치스코의 일화가 떠올랐습니다. 프란치스코가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회개의 길을 걸었을 때, 프란치스코는 아시시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먹을 것이나 성당 수리를 위한 물건을 청하기 위해 아시시 시내로 들어온 프란치스코는 자연스럽게 아버지나 친척이나 지인들을 만나곤 하였습니다. 그들은(특히 아버지) 프란치스코를 이해하지 못했고 프란치스코를 미친놈 취급을 하고 그에게 저주와 비난의 말을 쏟아내었습니다. 이것을 듣고 나서, 프란치스코는 거지를 찾아가서 그에게 부탁을 하였습니다. 그가 자기 아버지 대신으로 그에게 하느님의 축복을 내리도록 부탁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거지로부터 그 축복을 받고 다시 일상으로 힘차게 나아갔습니다.
초기에 사람들로부터 조소와 비난을 받던 프란치스코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리고 형제회가 성장함에 따라, 사람들로부터 살아있는 성인으로 칭송을 받곤 하였습니다. 하루는 누군가 그를 성인으로 칭찬하자, 프란치스코는 “하느님께서 자기에게 내리신 축복을 다른 누군가에게 내렸다면 그는 자기보다 더 훌륭히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라고 응답을 하였습니다.
회개한 프란치스코는 사람들의 인정이나 비난에 얽매이는 삶이 아닌, 하느님 안의 자기 모습을 찾아가는 자유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의 삶이 무르익었을 때에도, 그는 자기 힘이 아닌 하느님의 힘으로 자기의 삶이 유지됨을 알고 있었고 자기를 통해 일어나는 모든 선을 하느님께 돌리곤 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는 그와 같은 삶으로 다른 이들을 초대하며 다음과 같은 권고를 남겼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천하고 무식하며 멸시받을 자로 취급받을 때와 마찬가지로, 칭찬과 높임을 받을 때도 자기 자신을 더 나은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 종은 복됩니다. 사실, 인간은 하느님 앞에 있는 그대로이지 그 이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에 의해 높은 자리에 올랐다가, 자기 의지로 내려오기를 원치 않는 그런 수도자는 불행합니다. 그래서 자기 의지로 높은 자리에 있지 않고, 다른 이들의 발 아래 있기를 늘 열망하는 ‘그런 종은 복됩니다’”.(권고 19. 하느님의 겸손한 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