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
오늘 눈먼 이가 자비를 청하는데
자비의 내용은 다시 보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은 저도 다시 보게 되는 자비에 대해 묵상해봤습니다.
그러나 제가 다시 본다는 것은 복음의 눈먼 이와 다릅니다.
저는 그와 달리 눈먼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말에 다시 보게 되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같은 사람인데 전에는 이렇게 보다가 다르게 보게 될 때 이르는 말이지요.
예를 들어 옷차림이 후줄근하고 초라하여 우습게 보았는데
선뜻 큰돈을 희사하는 것을 보면 다시 보게 되지요.
그러니까 그때부터 그가 달리 보이는 것인데,
그는 변한 것이 없고 나의 눈이 바뀐 겁니다.
첫째로 그것은 교만의 눈에서 겸손의 눈으로
나의 눈이 바뀜으로써 다시 보는 차원입니다.
교만한 사람의 눈은 남을 대체로 얕잡아 보고 심하면 무시하고 업신여깁니다.
사실 무시한다는 한자어나 업신여긴다는 우리말은 같은 뜻입니다.
무시(無視)한다는 말은 없을 無와 볼 視가 합쳐진 말이고,
업신여긴다는 말은 ‘없이 여긴다’는 말의 변형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두 말 다 엄연히 있어도 없다고 보거나 없이 여기는 것이니
얕잡아 보는 것 곧 나보다 낮게 보는 것보다 훨씬 잘못 보는 것이지요.
다음으로 미움의 눈이 사랑의 눈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미움의 눈으로 보면 그의 잘못만 보이는데
사랑의 눈으로 보면 그의 고통이 보입니다.
사랑을 하면 이해하려는 눈으로 보게 되고
그가 그런 것은 그가 큰 고통을 겪고 있어서 그런 것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다르게 하면 그의 겉만 보지 않고 그의 안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시 보고자 하는 것은 이 정도가 아닙니다.
세상 것만 보던 눈이 신비도 보는 눈으로,
육의 눈으로만 보던 것이 영의 눈으로 보는 것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보는 것과 같을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그렇게 땅만 보는지 모르겠습니다.
가을이 됐는데 단풍도 못 보고 한해가 지난 적도 있습니다.
땅만 보게 하는 육의 정신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인데
그러다가 그런 자신을 자각하고 하늘을 봐야겠다고 작정하면
그때부터 서서히 보는 눈이 달라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늘 보던 것만 보지 않고 새로운 것을 보기 시작하고,
늘 보던 것을 보더라도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될 것이고,
복음의 눈먼 이와 군중처럼 달라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다.
군중도 모두 그것을 보고 하느님께 찬미를 드렸다.”라고
오늘 복음이 얘기하듯 우리도 그것을 보고
하느님을 찬미하고 주님을 따르는 너와 내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