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카베오서는 어제 이스라엘의 위대한 어른 엘아자르의 얘기를 전한 다음,
오늘 위대한 엄마의 얘기를 전하는데 일곱 아들을 한 번에 다 잃으면서도
이스라엘의 신앙과 자존심을 지키라고 가르치고 독려하는 어머니 얘기입니다.
이런 어머니 얘기가 우리에게는 비현실적인 얘기라고,
교훈을 주기 위해 지어낸 얘기일 뿐 있을 수 없는 얘기라고
치부할 수도 있는데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분들에게 저는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를 예로 들어 그렇지 않다고 강변합니다.
그분은 사형을 앞둔 아들에게 수의를 지어주며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기보다는
다음 생에는 천부의 아들 곧 하느님의 아들로 태어나라는 편지를 보내시지요.
그런데 안 의사의 어머니 조 마리아나 오늘 일곱 아들의 어머니나
공통점은 하느님께 믿음과 희망을 둔다는 점입니다.
“특별히 그 어머니는 오래 기억될 놀라운 사람이었다.
그는 일곱 아들이 단 하루에 죽어 가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주님께 희망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용감하게 견디어 냈다.”
하느님께 완전한 희망을 두면 이 세상에 살면서도
진정 이 세상의 어떤 미련도 애착도 없음은 물론
이 세상의 죽음에 대해 아무런 두려움도 없습니다.
그리고 미련이나 두려움이 없는 대신 확신이 있습니다.
자식을 신앙 때문에 죽게 하는 것이 더 큰 사랑이라는 확신도 말입니다.
자식이 이 세상에서 건강과 부귀영화를 누리게 되기를 바라는 것도
어미의 사랑이지만 그것은 현세적이고 거의 본능적인 사랑인 데 반해
저세상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기를 바라는 것은 어미의 더 큰 사랑이요
어미의 본능적 사랑을 초월하는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제 성모 자헌 축일 강론에서도
아들을 위해 자신을 바치는 것은 다른 엄마들도 하는 것이지만
인류 구원을 위해 바치는 것은 다른 엄마들과 차원이 다른
성모님의 봉헌이라는 점을 말씀드린 바 있는데 같은 맥락입니다.
제가 잘못 알고 있는지 모르지만 제 생각에
우리 인간에게 ‘미래 본능’이라는 것은 없고,
본능에는 ‘미래희망’ 같은 것이 없고 철저히 현세적입니다.
제 생각에 본능이란 눈이 멀었기에
본능이 발동하면 미래나 방향 같은 것이 없고,
철저하게 그 순간의 자기 본능을 따라갈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랑도 본능에 이끌리지 않고
늘 주님을 향하고 주님께 희망을 두도록
우리의 사랑이 어디를 향하는지 관찰하고 감시도 해야 할 것입니다.
제 생각에 이것이 우리의 기도 가운데서도 관상적 기도일 것입니다.
관상적 기도가 우리의 본능적 사랑의 등대가 되어 우리의 사랑이
하느님 사랑에 희망을 두고 그 사랑에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게 되기를
또한 희망하는 오늘 우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