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마또레 평화기도 다락방 말씀기도
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촉진자',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17-19)
육신의 부활을 믿는 그리스도인
우리 육신이 세상 끝 날에 다시 살아날 것을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입니다. 이것이 가톨릭 신앙이요, 사도들의 신앙입니다.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그리스도를 믿으십시오. 모든 불신을 밀쳐 두고, 그대가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를 생각하십시오. 사람의 머리카락 하나도 가벼이 보시지 않는 구원자께서 사람을 가벼이 보시겠습니까? 그분께서 우리 영혼과 육신에 영원한 생명을 주고자 하신다는 사실을 어떻게 의심할 수 있습니까? 그분은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자 영혼과 육신을 취하셨고, 돌아가심으로써 그 육신을 내려놓으셨다가 다시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가 죽음을 겁내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엑카르트의 영성에 영향을 준 신학들
4 베긴회 운동:
엑카르트의 성숙은 대학 사회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라인 강 유역의 수녀원과 교회들에서 셜교하고, 베긴회로 알려진 여성 평신도를과 상담하고, 그들의 말을 귀기울여 듣는 것과 같은 활동 속에서 이루어졌다. 엑카르트의 영적인 통찰력이 상당 부분 여성적이라면 - 사실이 그러하다 - 그 이유는 그가 여성들이 영적 여정에 대하여 무엇을 말하는가를 귀담아듣고 이해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여성들 역시 엑카르트의 말을 귀담아들었다. 우리가 엑카르트의 독일어 설교들을 접할 수 있게 된 것은 그의 설교들을 받아 적은 여성들 - 베긴회 회원들과 수녀들 - 이 있었기 때문이다. 설교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처럼, 엑카르트는 여러 가지 면에서 교권 반대자였으며,남성 우월주의에 과민한 성격이었다. 그는 이렇게 비평한다.
”나는 너무나 박학한 나머지 영향력 있는 사제가 되기를 바라는 성직자가 많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너무나 쉽게 만족에 빠져 바보가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설교 속에서 성직자의 무지를 자주 비꼬며, 힘은 있으나 무식하기만 했던 자들을 재판정에서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는 비판주의자였다. 그는 자기의 문화, 자기의 성, 자기의 교회를 비판했다.
그는 “주님의 말씀이 잘못 이해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당대의 제도들을 비판했다. 예언자라면 당연히 그럴 것이다. 강인하고 교양이 넘치는 여성들, 베긴회로 똘똘 뭉친 여성들, 사회제도와 교회제도를 신랄하게 비판한 여성들이 예민하고 정직한 설교자에게 영향을 주지 않았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은 엑카르트에게 감화를 주었다.(66)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다락방 11월 4주간
금주간 성서읽기 1티모 1-6장
<생태 영성 주간>
생태 지향 : 고요와 침묵과 절식을 통한 단순한 삶
개인 혹은 공동체 차원에서 먼저 하루를 정해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수요일 그리스도인 일치의 날
세계 교회사, 아우구스트 프란츤
제 2부 중세 그리스도교
제 2기 : 700 ∼ 1050년
제 6절: 신성 로마 제국
1046년까지의 오토 왕조와 잘리에르 왕조
하인리히 3세(1039∼1056)
그러는 동안 로마에서는 크레센티우스파와 투스쿨룸파의 귀족 명문들 사이의 불명예스러운 다툼이 때때로 중단되기는 하였으나 계속되었다. 투스쿨룹파는 젊은 베네딕토 9세(1032∼1045) 라는 최고의 문제아를 베드로좌에 앉혔다. 확실히 그의 이미지는 훗날 반대파의 중상에 의하여 심하게 잘못 묘사되었을 것 같다. 아주 최근의 연구는 그에 대하여 조심스럽게 평가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그가 12세에 교황위에 올랐다는 것과 극악무도하였다는 것은 믿을 수 없다”는 것이고, 또한 그가 “도덕적인 타락의 전형이었다는 것은 후세의 조작이다” (Schieκr). 크레센티우스파는 1045년에 실베스테르 3세라는 대립 교황을 내세웠다. 로마에서 추방된 베네딕토는 고액의 대가를 받고 지신의 교황위를 로마의 수석 사제인 요한 그라시이누스에게 양도하였다. 교회를 베네딕토로부터 해방시키겠다는 고결한 의도만이 그로 하여금 이러한 행위를 하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을 그레고리오 6세(1045/1046)로 명명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곧 베네딕토가 로마로 돌아왔으므로 이제 세 명의 교황이 생겼고, 그들은 이 최고의 지위를 둘러싸고 투쟁하였다.
이때 하인리히가 개혁가 친구들의 요청으로 첫 로마 원정(1046∼1047)을 시작하였다. 그는 먼저 북부 이탈리아에서 긴급한 제국의 일들을 처리하고, 1046년 12월에 로마와 수트리에서 교회회의를 개최하였다. 이들 회의에서 세 명의 교황을 모두 폐위시키고, 로마인들이 선출한 밤베르크의 주교 수이트거를 새 교황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자신을 클레멘스 2세(1046∼1047)로 명명하였다. 하인리히는 다음의 교황들도 로마인들의 “선거”로 지명하였다. 그들은 모두 독일인 주교들이었는데, 즉 브릭센의 포포(다마소 2세. 1048), 툴의 브루노(레오 9세. 1049∼ 1054), 아이히슈테트의 게프하르트(빅토리오 2세. 1055∼1057)였다. 교황 선거에 대한 이와 같은 간섭보다 황제의 권세있는 지위를 더 잘 드러내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황제는 교회의 주인이었다.(1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