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은총의 길을 따르기 위해 적합한 인물들로부터 배우기
우리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우리의 부모들은 좋은 친구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곤 하였다. 친구들은 우리를 성장시키기도 하고 길을 잃게도 하였다. 그런데 우리가 성인이 되고 우리가 많은 것을 통제할 수 있다고 느낄 때, 우리는 부모의 권고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상황은 그렇게 바뀌지 않았다. 우리가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우리가 사귀는 친구의 유형은 우리에게 좋은 혹은 나쁜 영향을 줄 수 있다.
제임스 하포드(James Harford)는 자신의 책 “머튼과 친구들”에서 머튼이 말한 내용을 인용하였다. 머튼은 “록펠러(Rockefeller)가 아닌 소로(Thoreau)를 롤 모델로 배웠다.” … 나는 결국 핀볼 게임기처럼 다음과 같은 이들과 무엇에 매료되도록 방향지워졌다. 브레크(Blake),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아우구스티노(Augustine), 에카르트(Eckhart), 코메르스와미(Commeraswamy), 트러헌(Traherne), 홉킨스(Hopkins), 가톨릭 교회의 성사들. 하포드는 이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머튼의 가장 친한 친구가 다음과 같이 말하며 이 정서를 공감했다고 말한다. “우리는 상업적인 세상과 반대 방향으로 나아갈 무언가를 할 수 있다고 느꼈다. 우리는 그 세상과 잦은 충돌을 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그 세상을 좋아하지 않았다.”
우리는 친구 그룹에서 종종 멘토로 여기는 친구가 있다. 이 멘토 친구는 우리가 삶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우리가 이 관계에서 제공된 지혜를 우리가 어떻게 적용하는지는 중요하다.
나의 책 「사막을 건너서(Crossing the Desert)」의 “사막의 수련자 되기(On Being a Desert Apprentice)” 장에서 내가 목표로 삼았던 것 중의 하나는 잠재력 있는 멘토의 특성을 나열하는 것이었다. 이 나열이 완벽하지는 않지만, 좋은 멘토의 자질들은 다음과 같다.
그는 자기에게 도움을 구하는 이들에게 받아들임과 공간을 제공한다.
그는 힘을 북돋아 주고 전파하는 거룩함을 지닌다.
그는 “초월-평범성(extra-ordinariness)”, 겸손, 투명성, 그리고 현실성의 본보기가 된다.
그는 전망을 제공하는데, 특히 어둠 속에서 그러하다.
그는 가능과 도전의 역설을 보여준다.
그는 자기-중심적으로 의식하지(un-self-conscious) 않는다.
그는 지금에 정통한다.
그는 문제들의 해답을 구하기보다는 그 문제와 함께 사는 법을 구한다.
그는 메시지에 방해거리가 되지 않고, 개인의 궁극적 독립성을 없애지 않으며, 성령의 움직임에 간섭하지 않는다.
멘토, 지도자, 안내자에게 기대하는 무엇과 연관해서, 우리 측에서 우리가 ‘멘토’라는 선물을 보완하기 위한 특성들 또한 가져야 하고 이를 성장시켜야 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행함에 마음을 쏟아야 한다. 즉 원하기만 하거나 변화에 대해 말만을 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자신이 진지하게 멘토와의 관계를 추구하는 이유를 알아야 한다.
우리는 멘토를 구하는 중요한 발걸음을 할 때에나 다른 누군가를 위해 그런 현존을 요청받을 때, 우리는 현시대의 ‘아빠’와 ‘암마’(영적 스승)는 진실로 어떠해야 하는지 인식해야 한다.
우리는 하느님, 우리 신앙, 우리 자신에(우리의 선물들과 성장 지점들) 대해 새로움을 발견하는 데에 기꺼이 열려 있어야 한다.
우리는 멘토 관계에서 배운 무엇과 연계하여 우리 자신의 기도 규칙을 만드는 것의 중요성을 실감해야 한다.
우리는 배운 것들을 “계속적 공부(over-learn)”로 추구해야 하는데, 그렇게 함으로 배운 것들이 우리의 자세로 그리고 일상 삶의 부분이 되어야 한다. 단순히 배운 것이 우리 삶에서 ‘신앙의 구석’이라 곳에 격리되어서는 안 된다.
지금까지 묘사된 방식으로 멘토와 함께하고 우리가 신앙의 역동에 자신을 기꺼이 열어젖힌다면, 우리는 항상 그곳에서 있던 은총의 길을 발견할 것이다. 이 열어젖힘으로 더 큰 내적 자유와 사랑, 그리고 연민을 향한 문들이 우리에게 보일 때, 이것은 우리에게 얼마나 큰 선물일 것인가!
첨언)
프란치스코는 말년에 사람들로부터 살아 있는 성인으로 칭송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하는 일은 모두 하느님의 뜻에 따른 선한 일이라고 여겼고 그에게는 더 이상 누군가의 지시가 필요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프란치스코 본인 자신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이 다가왔을 때 작성한 유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이 형제회의 총봉사자와 그리고 총봉사자가 나에게 정해 주고자 하는 다른 수호자에게 기꺼이 순종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그리고 수호자는 나의 주인이기에 순종과 그의 뜻을 벗어나서는 아무 곳에도 가지 못하고 무엇을 하지도 못할 정도로 그의 손 안에 매여 있기를 원합니다.”
사실 그는 하느님 연민의 마음을 가졌기에, 자기보다 가난한 사람이 있으면 자기의 외투를 주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수호자는 그의 외투는 그의 것이 아니라 수도회 것이기에 프란치스코에게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자 프란치스코는 마음대로 외투를 가난한 이에게 벗어주지 못했다. 대신 수호자를 찾아가서 설득을 하여 무엇으로라도 가난한 이의 필요에 응답하곤 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는 공동체 수호자만이 아니라 개인을 위한 수호자로 누군가를 원했습니다. 개인 수호자 역할을 한 형제는 어떠했을까요? 살아 있는 성인의 장상 역할을 한다는 것은 참 부담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역할을 하면서, 그는 자신을 믿는 프란치스코를 만났을 것이고, 또한 자기 마음에서 한 사람을 진정으로 위하는 움직임을 읽어내고 피어나게 했을 것입니다. 프란치스코와 개인 수호자는 서로를 살아나게 하는 관계를 지향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