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마또레 평화기도 다락방 말씀기도
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촉진자',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2023년 12월 13일 수요일
교부들의 말씀 묵상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30)
은총이 우리를 지고 간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예언자는 죄인들의 짐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의 노여움으로 제 살은 성한 데 없고 저의 죄로 제 뼈는 온전한 데 없습니다”(시편 38,4).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예언자는 죄인들의 짐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의 노여움으로 제 살은 성한 데 없고 저의 죄로 제 뼈는 온전한 데 없습니다”(시편 38,4).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29절). 오, 짐 진 이들에게 힘을 북돋아 주는 참으로 기분 좋은 무게여! 세상 주인들의 짐은 종들의 힘을 점점 더 빠지게 하지만 그리스도의 짐은 그 짐을 진 이들을 오히려 도와줍니다. 우리가 은총을 지고 기는 것이 아니라, 은총이 우리를 지고 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은총을 돕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도우라고 은총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마태오 복음 미완성 작품-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엑카르트의 영성에 영향을 준 신학들
5. 아우구스티누스를 경유한 신플라톤주의:
엑카르트의 영성에서 드러나는 주요 신학적 주제들
2. 복:
액카르트는 모든 창조물이 하느님의 복이며, 거룩한 “존재”가 만물에 스며들어, 만물을 존재의 수준에서 동등하게 한다고 말한다.
그는 인간을 새롭게 뜻매김한다: 인간은 창조성과 자비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복을 베풀도록 운명지어진 복덩어리다. 다른 피조물들도 무의식적으로 우리에게 복을 베푼다. 히브리 성서 야훼계 저자가 그렇듯이, 엑카르트에게도 “삶이 복이고, 복이 삶이다." 삶의 목적은 대지에서 달아나거나 기쁨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받은 복을 다른 피조물과 다른 세대의 인간에게 돌려주는 것이다.
3. 만유내재신론:
엑카르트는 하느님을 ”저기 바깥에” 있는 위격으로 생각하거나 하느님을 “저기 바깥에” 있는 전적 타자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다. 하느님은 우리 안에 있고, 우리는 하느님 안에 있다. 이것이야말로 엑카르트의 하느님 담화, 엑카르트의 하느님 의식을 구성하는 안의 신학. 만유내재신론의 신학이다. 이러한 신학은 어디에나 있는 하느님, 맑게 비치는 하느님을 강조한다.(77)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다락방 12월 2주간
<금주간 성서 읽기> 묵시 1-6장
<생태 아낌 주간> 물.전기.자동차.구매와 소비
수요일 그리스도인 일치의 날
세계 교회사, 아우구스트 프란츤
제 2부 중세 그리스도교
제 3기 : 1050 ∼ 1300년
중세 중기 교회의 전성
제 1절: 클뤼니와 수도원의 개혁운동
중세의 가장 중요한 수도원 개혁운동은 클뤼니에서 시작되었다.
아퀴타니아의 공작 빌헬름은 908/910년에 부르고뉴에 클뤼니 수도원을 설립하였다. 9세기에 교회 쇠퇴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수도원의 무방비함과 부자유함 내지는 수도원이 세속과 교회의 권세가들에게 예속됨이었다는 올바른 인식에서 빌헬름 공작은 자기가 창설한 수도원에 대하여 대내외적인 고유한 일에서 자유를 확약하였다. 또 자유로운 수도원장의 선거, 그리고 교구 주교의 재치권으로부터의 면속도 설립 통지서와 교황의 특별한 보호 특권에 의하여 보증되었다. 베네딕토 규칙서의 엄격한 준수, 수도원장에 대한 순명 의무를 첫째로 하는 엄격한 금욕과 전례예식의 특별한 장려는 이 수도원의 정신을 특징지었다. 그것은 다음의 위대한 수도원장들 밑에서 교회 내의 가장 강력한 종교적 힘이 되었다. 그들은 베르노(909∼927), 오도(927∼942), 아이마르 - 942년이나 9488년부터, 954년에 눈이 멀자 그는 마졸로를 보좌로 채용하였다 -, 마졸로(954∼994), 오딜로(994∼1048), 위고(1049∼1109), 베드로 존자尊者(1122∼1156) 등이었다.
후기 카롤링거 시대의 세속화 과정에서, 그러나 오토 시대에도 매우 무관심했던 이 세상과 문화 향락주의에 대한 대형물로서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거리를 제시하고, 세속화 위험에 저항할 과제가 수도생활에 주어졌다. 수도생활은 모든 시대에 자체의 종교적 활동력을 통해 교회의 개혁을 내부로부터 촉진하고, 본질적인 종교적 사명을 위해 필요한 내면성과 영적 자유를 교회에 보증할 힘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서구의 수도생활은 신비적 경향을 지닌 동방의 수도생활과는 달리, 전 그리스도교계에 대한 공동책임을 더욱 강하게 지향하였다. 그러므로 클뤼니의 운동도 순수하게 수도생활상의 현상에 머물지 않고, 곧 서구의 역사를 함께 결정적으로 형성하게 된 것을 이해할 수 있다.(1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