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워하지 마라, 즈카르야야. 너의 청원이 받아들여졌다.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터이지만 많은 이가 그의 출생을 기뻐할 것이다.”
오늘 주님의 천사는 즈카르야에게 그의 청원이 받아들여졌다고 얘기하고,
이어서 그것이 그의 기쁨일 뿐 아니라 많은 이의 기쁨이 될 거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즈카르야는 아이를 달라고 청원을 한 셈입니다.
그러나 그 청원은 소싯적 청원이었을 것입니다.
설마 70 넘어서까지 자식을 달라고 했겠습니까?
만약 그랬다면 정말 주책바가지라고 해야 하겠지요.
그러니 이 청원은 젊었을 때 한 것이고,
그야말로 묵은 청원이 이루어진 것인데,
그렇다면 응답이 주어졌을 때 기뻐 날뛰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어찌 불신의 태도를 보입니까?
진정 늙은이가 애를 낳는다는 것은
아무리 하느님이어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입니까?
제 생각에 그런 것은 아니고
그래서 즈카르야의 불신을 너무 나무라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능력을 의심한 것이라기보다는
그런 일이 자기에게 생긴 것이 도저히 믿기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기쁜 일이든 슬픈 일이든 너무 엄청난 일이 닥치면
순간은 믿기지 않는 것이 보통이고
그래서 그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헷갈리곤 하는 것이 보통이지요.
어두운 데 있다가 바로 밝은 데 나가면,
반대로 밝은 데 있다가 바로 어두운 곳에 들어가면
너무 눈이 부셔서 또는 너무 캄캄해 감각 기능이 순간 망가지듯
우리의 믿음 기능도 순간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쨌거나 불신의 말은 입에서 나오지 말아야 하기에
구원의 찬미가 제대로 터져 나올 때까지 벙어리가 되어야 하고,
그리고 벙어리 냉가슴 앓듯 영적인 냉가슴을 앓아야 합니다.
그리고 냉가슴을 앓는 동안 늙은이의 가슴은
젊은이의 가슴처럼 다시 그리고 점차 끓어올라야 하고,
고작 자기 소원이 이루어진 것을 기뻐하는 작은 가슴이 아니라
인류 구원이 이루어진 것을 찬미하는 큰 가슴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천사는 너도 기뻐할 테지만 많은 이가 기뻐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이 글을 읽는 분 중에 즈카르야처럼 늙은이라고 생각되는 분이 있다면
고작 젊어지거나 젊게 살려고 애쓰지 말고 구원을 살려고 애써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자식이 태어난 것을 기뻐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식이 구원의 도구가 됨을 기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