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의 말을 믿지 않아서
즈카르야는 결국 벙어리가 됩니다.
하지만 엘리사벳의 임신은
엘리사벳에게도 즈카르야에게도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누가 하느님의 은총을 받았는지
알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방법 가운데 하나는 자손이었습니다.
즉 아내의 불임은
하느님의 은총을 받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엘리사벳은 아이를 못낳는 여자였고
둘 다 나이가 많아서
둘은 아이를 포기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자식이 없는 것에서 오는 고통은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녀를 하느님의 은총과 연결하는 사회에서는
더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이제 아이가 주어졌습니다.
즈카르야가 벙어리가 되어 힘들었겠지만
아이를 얻은 기쁨은
그것을 딛고 넘어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오랜 기간의 고통이
한 순간에 해결되는 것처럼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들의 기쁨은 그들의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천사도
요한의 출생을 많은 이가 기뻐할 것이라고
예고합니다.
그 부부의 기쁨,
많은 이들의 기쁨은
그들의 기다림에서 옵니다.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은 나이가 많이 들 때까지
고통 속에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수 많은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 고통을 하느님께서는 잊지 않으시고
그것을 기쁨으로 바꾸어주십니다.
물론 그들에게 뚜렷한 희망이 있어서
그들이 기다릴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과정 속에서
즈카르야에게는 말을 못하게 되는 고통이
더해집니다.
그들에게 있었던 유일한 희망은
하느님께서 그들을 잊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고통의 해결까지는 생각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느님께서 그들을
고통 속에 버려두지는 않으실 것이라는 생각
버려두지 마시라는 기도가
함께했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잊지 않으시는 것처럼
우리도 하느님을 잊지 않는다면
우리도 기쁨을 기다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