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에 이어 복음은 잉태를 이야기합니다.
어제는 세례자 요한의 이야기였다면
오늘은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두 군데에서 복음은 성령을 이야기하는데
그 방식은 서로 조금 다릅니다.
요한의 경우
요한이 어머니 태중에서부터
성령으로 가득 찰 것이라고 말합니다.
반면 예수님의 경우
성령께서 마리아에게 내려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보았을 때
둘은 서로 다르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시는 것을 준비하기 위해
마리아의 몸은 성령으로 채워집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오시는 것을 준비하기 위해
요한의 몸도 성령으로 채워집니다.
즉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관점에서는
엘리사벳보다 요한이
직접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에
엘리사벳이 아닌 요한에게
성령이 내려오는 것은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그리고 성령이 내려오시는 것은
마리아와 요한의 경우 둘 다
예수님께서 오시는 것을 준비하기 위한
작업이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세례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영을 받습니다.
견진으로 받은 성령을 굳게 만듭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는 것도
예수님께서 오시는 것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마리아와 요한의 경우는
세상 속으로 하느님께서 오시는 것을 의도한다면
우리의 경우
우리 안으로 하느님께서 들어오시는 것을
의도할 것입니다.
물론 우리를 통해
하느님께서 세상 안에 현존하시지만
하느님을 받아들이기 위해
우리는 세례와 견진을 통해
성령을 받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역할은
마리아처럼 예수님을 잉태하는 것이고
요한처럼 이 세상에 계시는 예수님을
사람들에게 가리켜주는 것입니다.
대단히 거창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러한 것들은
우리가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려고 노력할 때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들입니다.
즉 성령을 받은 우리의 역할은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그 복된 여정에
하루 하루 충실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