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마또레 평화기도 다락방 말씀기도
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촉진자',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2023년 12월 27일 수요일
교부들의 말씀 묵상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갔다.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요한 20,3-4)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베드로와 요한이 되어
서둘러 무덤으로 가십시오.
고귀한 경쟁에서 질세라
빨리 달려가십시오.
설사 그대의 발걸음이 더 빠르지 못하더라도
그것을 누가 더 간절히 바라는지
보여 드리는 일에서는 승리하십시오.
무덤 안을 들여다보지만 말고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본서의 독법
나는 엑카르트가 자기의 신앙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 언어에 독자들이 맛들이기만 한다면, 그 언어가 독자들의 영성생활에 에너지와 창의성을 제공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왜냐하면 나는 그러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자주 목격했기 때문이다. 엑카르트가 650년 전에 수많은 사람을 감동시킨 것도 이 때문이다. 엑카르트는 지금도 여전히 독특한 감화력을 가지고 있다.
엑카르트는 머리와 함께 가슴으로 읽어야 제격이다. 왜냐하면 여느 참된 신비가들과 마찬가지로 엑카르트도 머리와 함께 가슴으로 삶을 경험했고, 지신이 경험한 것을 그런 식으로 되새겼기 때문이다. 특히, 나는 독자들이 벗들 앞에서 엑카르트의 설교를 큰 소리로 읽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엑카르트의 설교들은 그가 눈으로 보는 것은 물론이고 입으로 말하고 귀로 들었던 구두 작품들이다- 실로, 엑카르트의 설교에는 오늘날의 뛰어난 설교자에게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구두 수사학이 상당히 많이 들어 있다.
이 설교들을 읽은 한 독자는 이렇게 평했다. “엑카르트의 설교들은 미국의 흑인 교회에서 발전된 설교 방법과 유사한 수사법으로 되어 있군요" 엑카르트 설교에는 반복되는 표현들, 음악 같은 후렴이 있으며, 청중과의 교감이 있다. 청중들에게 조용히 해 딸라고 말하거나, 자기가 말하려고 하는 것에 주의를 기울여 달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때때로 엑카르트는 청중들을 웃음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것 같다. 유머야말로 마이스터 엑카르트를 읽고 이해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요소다. 그를 심문하던 자들이 유머를 결여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들이 엑카르트 사상의 상당 부
분을 오해했던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84)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다락방 12월 4주간
<금주간 성서읽기> 묵시 15-22장
<생태 영성 주간> 고요와 침묵과 절식을 통한 단순한 삶
수요일 그리스도인 일치의 날
세계 교회사, 아우구스트 프란츤
제 2부 중세 그리스도교
제 3기 : 1050 ∼ 1300년
중세 중기 교회의 전성
제 1절: 클뤼니와 수도원의 개혁운동
후에 클뤼니와 나란히 또 다른 개혁운동들이 그리스도교적 생활의 내면화와 심화하려는 정신에서 활약하였다. 로트링겐의 고르츠 수도원은 933년에 방디에르의 요한에 의하여 창설되었고, 특히 독일 쪽으로 전파되어 150여 개의 수도원과 연합하였다. 브로뉴 • 히르사우 · 지크부르크 • 아인치델른도 개혁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는데 그 고유한 의의는 최근의 연구에서 비로소 올바르게 인정되었다. 그런데 독일의 수도원들은 클뤼니계 수도원들 보다는 강하게 당시 지배적인 봉건적 • 귀족적인 방향의 범위 안에서 지속되었다. 중요한 오랜 제국 수도원들은 클뤼니의 중앙집권적이고 반봉건적인 수도원 개혁에 유보적이었거나 거부적이기까지 하였다. 그 수도원들은 오토적 제국교회로서의 의무를 느끼고 있었고, 그래서 후에 발생한 황제와 교황 사이의 투쟁에서 대부분 황제의 편을 들었다.
클뤼니 개혁과 “그레고리오 개혁”에 대한 역사적 관계에 관한 질문이 최근의 연구에서 새롭게 제기되었다. 연구의 결과, 직접적인 영향에 대해서는 거의 문제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클뤼니는 서임권 논쟁을 일으키지 않았다. 또한 그것은 논쟁된 개혁의 문제들 - 서임권, 사제의 결혼 등 - 에 있어서도 하등의 극단적인 입장을 변호하지 않았고, 처음에는 어떠한 정치적인 영향도 전혀 의도하지 않았다. 십자군 이념의 전개나 그리스도교 선교의 확장 문제와 마찬가지로, 교황의 주도권 주장을 관철하는 것도 를뤼니 개혁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그것은 수도원의 개혁과 교회개혁 운동에 그쳤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교 생활의 심화로 이끌었고, 동시에 공생활에서 종교의 중요성, 이 세상에서 교회와 그 우두머리인 교황의 지위, 현존하는 교회의 폐해, 교회의 큰 과제들 등에 필요한 사상들을 지시하였다. 그렇게 그것은 앞으로의 발전을 위한 터전을 간접적으로 준비하였고, 그 결과 그것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것이 되었다.(2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