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스테파노 축일에 이어 오늘 사도 요한의 축일도
주님을 바라봄 곧 관상에 관한 말씀을 듣습니다.
어제 스테파노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있고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오늘 사도 요한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처음부터 있어 온 것, 우리가 들은 것, 우리 눈으로 본 것,
우리 손으로 만져 본 것, 이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그 생명이 나타나셨습니다. 우리가 그 생명을 보고 증언합니다.”
성탄으로 주님께서 나타나심으로 볼 수 있게 되었기에
성탄 축일 다음에 두 성인의 축일을 이어 지내고 있고
주님을 바라봄, 관상과 관련한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그런데 관상은 두 성인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결코 시력의 문제가 아니고 사랑의 문제입니다.
그렇기에 신학 공부를 아무리 많이 했어도
관상에 있어서 사랑하는 사람을 능가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요한은 진정 사랑꾼이고 관상가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예수께서 사랑하신 제자”라고
자신에 대해 아무 주저함 없이 얘기합니다.
그런데 이 말은 주님께서 다른 제자들은 사랑하지 않고,
요한만 사랑했다는 뜻이 아닐 것입니다.
주님께서 타볼산에 오르실 때나 죽은 소녀를 살리실 때나
겟세마니에서 피땀 흘리실 때 베드로 야고보와 함께
요한만 데리고 가신 것을 뜻하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그 말은 예수님의 사랑을 요한이 사랑했다는 뜻일 것이고,
예수님의 사랑을 다른 제자들보다 요한 자기가 더 사랑했다는 뜻일 것입니다.
사랑은 상대적입니다.
적절한 예가 되지 않을 수 있지만
어미 새가 먹이를 가지고 올 때 입을 더 크게 벌린 새끼에게 먹이를 주지요.
그래서 새들은 어미가 왔을 때 더 크게 입을 벌리고 더 크게 소리를 냅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주님 사랑을 무시하고,
어떤 사람은 주님 사랑을 마다하고,
어떤 사람은 주님 사랑에 투정을 부리고
어떤 사람은 주님 사랑을 조금만 받아들이고,
어떤 사람은 주님 사랑을 스펀지 빨아들이듯 받아들입니다.
이렇게 사람에 따라 사랑에 달리 대응하기에
어떤 사람은 주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아 결과적으로 사랑받지 못하고,
어떤 사람은 주님 사랑을 다 받아들이기에 결과적으로 흠뻑 사랑받고,
더 받아들이기에 안 받아들인 사람에 비해 더 많이 받은 셈이 되지요.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모두가 성령 충만하기 전에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실 때는,
요한만 성모님과 여인들과 함께 십자가 밑에 있었습니다.
요한이 더 사랑했다는 표시가 아닐까요?
주님 사랑을 더 사랑했기에 더 주님 사랑을 많이 받은 요한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사랑하지는 않더라도 지금보다는
더 많이 사랑하여 주님을 사랑을 더 많이 받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