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누가 누구를 능가하는 것을 그렇게 좋게만 얘기할 수 있을까요?
이겨야만 사는 요즘 경쟁사회의 얘기인 것만 같아서 말입니다.
그러므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우리는 정말 잘 이해해야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물론 세속적인 성공 면에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능가하라는 게 아닙니다.
의로움 면에서 그들보다 능가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의로움일지라도 경쟁적인 의로움은 아니 될 것입니다.
우리의 많은 다툼이 다 이러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보다 더 옳다고 하면서 싸우니 말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것에서 남을 이기는 것보다는
의로움과 사랑에서 남을 이기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르지만
이기기 위한 의로움은 아니 되고,
주님의 가르침도 이런 것이 아닐 것입니다.
주님의 가르침은 우선 율법학자와 바리사이의 의로움은
참된 의로움이 아니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하고 더 나아가 자기들만 의롭다고 하지만
그것은 위선이고 독선이라고 주님께서는 비판하십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의로움이 왜 참된 의로움이 아닌가 하면
그들의 의로움은 위선이고 독선이기 때문이며,
그들의 의로움은 하느님 나라의 의로움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의로움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의로움은 의로운 체 하는 것이며
그렇게 의로운 체 하는 것으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그래서 주님께서는 오늘 분명하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참된 의로움은 상대적인 의로움이 아니라 절대적인 의로움입니다.
도토리 키 재기 식으로 누구보다 더 의로운 게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의로움이 그 절대적 기준인 의로움이고,
이 하느님 나라의 의로움을 이상으로 삼는 의로움입니다.
수도원에 들어와 한 동안 저는 누구보다 가난하려고 하였고,
누구보다 가난하게 살려는 저에 대해 영적인 우월감을 느끼곤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프란치스코의 가난을 보면서
왜 내가 프란치스코의 가난을 기준삼거나 거울삼지 않고
누구와 비교하여 더 가난한 가난에 집착하고 우쭐해 하는지 반성했습니다.
지금도 그럴 수 있습니다.
누구와 같지 않음에 안심하거나 우쭐해 하는 유치함이 있습니다.
하느님 마음에 드는 게 아니라 인간 마음에 들고자 합니다.
사랑이 아니라 승리를 위해 의롭고자 합니다.
그래서 고작 누구를 능가하는 것으로 만족삼지 않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의로움을 추구하기로 결심하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