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오늘 복음의 세례자 요한처럼 누구인지 질문을 받습니다.
질문을 받지 않더라도 스스로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묻지 않고 물음도 받지 않는 사람은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며 살게 되겠지요.
그래서 하인인데도 주인처럼 행세하며 살다가 나중에 큰코다치고,
주인인데도 종처럼 일생을 슬프고 불쌍하게 심지어 불행하게 살게 되겠지요.
그렇다면 나는 누구입니까?
아니, 누구로 알고 살아야 합니까?
이 물음에 정답은 있습니까?
있다면 그 답은 무엇입니까?
그 답이 오늘 세례자 요한의 대답이 아닐까요?
아니, 틀림없이 요한의 대답이 정답이고 우리는 그렇게 믿습니다.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나는, 우리는, 외치는 분의 소리랍니다.
그런데 소리라면 아무것도 아니지요.
말도 안 되는 소리이고,
개소리이기도 하고,
시끄러운 스피커 소리이기도 합니다.
무의미하거나 남에게 괴로움만 주는 소리일 뿐이라는 얘깁니다.
시끄러운 스피커 소리라고 하니 가끔 차에 큰 스피커를 달고 다니며
‘예수 천국, 불신 지옥’ 류의 선교를 하는 사람들이 생각납니다.
그들의 소리는 아무리 커도 사람들이 듣지 않아
시끄러운 소리 곧 소음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아무튼 소리는 아무리 그 소리 커도 소리만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고
말을 만나야지만 의미를 지니고 말씀과 만나면 더 큰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그러니까 세례자 요한과 같이 말씀을 전하는 소리는 의미가 있고,
성당의 종소리도 그 소리가 예수님을 실어 나르기에 의미 있지요.
그런데 성당의 종소리도 의미가 있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큰 의미가 있어야 하겠습니까?
그런데도 우리 인간은 말이랍시고 하지만
제소리를 내기에 의미가 없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인 우리에게 제소리는 개소리입니다.
반대로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낮추고,
주님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며 주님을 높일 때
우리의 소리는 주님께 영광 드리는 말이 되고 의미 있게 됩니다.
프란치스코는 왜 많은 사람이 당신을 따르느냐고 물었을 때
하느님께서 많은 은총을 자기에게 주셨기 때문이라고,
같은 은총을 강도에게 주셨다면 그는 자기보다 더 훌륭했을 거라고,
자신은 낮추고 하느님 은총은 드러냈기에 우리는
그를 성인이라고 하고 그가 전하는 하느님 말씀을 듣습니다.
그렇습니다. 거듭 얘기하지만
제소리는 개소리입니다.
제소리는 아무리 커도 아무 의미가 없는 개소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