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십니다.
당시에 누군가에게 세례를 주는 것은
세례를 받는 사람이
세례를 주는 사람의 제자가 되는 모습도
있었습니다.
요한이 예수님을 가리켜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라고
표현하는 것을 볼 때
요한이 예수님께 세례를 주는 것은
맞지 않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편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고 나서
성령께서 그분께 내려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으로서
어떤 관점에서 보자면
성부와 성령과 늘 함께하시는 분이신데
세례를 통해서 성령이 내려왔다는 표현은
세례 이전에는 성령이 함께하지 않았다는 식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이 두 가지는 예수님의 관점에서 보면
불필요한 것들로 보입니다.
세례를 주셔야 할 분이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이
세례를 통해서 성령을 받으시는 것이
이상하게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통해
공생활을 시작하십니다.
세상에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그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탄생을 통해 목자들에게 보여주셨고
오늘 세례로
하느님 나라 선포를 통해서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그 가운데 세례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당신을 드러내신
첫 번째 사건입니다.
목자들과 동방 박사들은
소수의 사람들이었지만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는
세례를 받기 위해 몰려온 사람들이
주위에 많았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비록 말씀은 하지 않으시지만
세례를 통해 당신이
성령과 함께하시는 분
요한이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라고
언급한 분이심을
드러내십니다.
즉 메시아가 이 세상에 왔다는 것을 드러내시면서
그 메시아는
강단에 서서 힘 주어 외치는 모습이나
강력한 치유 기적으로
당신을 드러내시는 것이 아니라
물 속에서 다른 이에게 세례를 받는
겸손한 모습으로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화려한 데뷔 무대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모든 이가 그분께 다가갈 수 있게 하려는 목적이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즉 모든 이에게 다가오실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식이라고 생각됩니다.
화려한 모습은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거부 반응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즉 당신의 겸손한 등장은
화려하건 그렇지 않건 모든 이를 배려하기 위한
마음이 있습니다.
겸손의 모습으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그것은 우리에 대한 배려이고 사랑입니다.
그 사랑에 응답하여
우리도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