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제이 윅스는 2부에서 예수님의 사마리아인 비유에서 우리 개인의 영적 양성의 핵심적 출입구로 이웃 사랑, 자기 사랑, 하느님 사랑을 읽어내고 그 길로 우리를 이끌고 있다.
첫 번째 출입구: 이웃 사랑
오래 전에 나는 한 때 ‘샴’ 만(the Gulf of Siam: 걸프 만)으로 알려진 곳에서 일주일 동안 긴 피정을 이끈 적이 있다. 참석자들은 네팔, 베트남, 태국, 방글라데시에서 온 성직자들, 수녀들, 평신도 선교사들이었다. 착한 사마리아인 비유에 근거하여 자비에 대한 세션들 중 하나를 끝내고 나는 질문이 있는지 물었다. 방글라데시에서 온 선교를 하는 한 온화하고 경험이 많은 성직자가 손을 들었다. 그는 “내가 한 사람을 일으켜 세우기 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몸을 그냥 넘어 지나갈 수 있을까요? 이 그룹에 정적이 흘렀고, 나는 즉각적으로 응답을 하기보다 그가 부연 설명을 할 수 있도록 기다렸다. 그는 말을 이었는데, “당신이 아시듯이, 수많은 필요들이 있고, 나는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고 내가 이 절박하게 가난한 나라에서 사목하며 만나게 되는 그 많은 것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비록 우리들은 이와 같은 극적인 가난이나 병고나 죽음을 일상에서 직면하지 않지만 다음과 같은 질문들은 여전히 우리에게 남아 있다. “어떻게 우리는 이 과정에서 소진되지 않고 다른 이를 향해 감정적인 불꽃을 확장시킬 수 있을까? 우리는 어떤 십자가를 지도록 불리움 받았고, 어떤 것은 그렇지 않은가?”
이 질문들은 이 장에서 이야기할 만하지만, 만약 우리가 이 질문들의 답만을 구한다면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이 질문들에 응답해야 하지만, 또한 생각해야 할 다른 질문들도 있다. 우리는 착한 사마리아인으로 어떻게 하느님을 새롭게 볼 수 있는 방식에 충실할 수 있는가? 어떻게 우리의 손 뻗침이 은총 순환의 일부가 되어, 우리를 더 깊은 자비와 내적 성취로 초대받게 할 수 있는가? 우리가 이 질문들을 어떻게 꺼내느냐에 따라 ‘우리가 삶을 충만하게 사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중요한 작용을 한다.
첨언)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회개 시작점으로 나환자와의 만남을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놀라운 점은, 프란치스코에게 나환자인 이웃 사랑과 하느님 사랑이 절묘하게 하나로 엮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을 사랑해서 이웃을 사랑한 것도 아니고 이웃을 사랑하고 하느님을 사랑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유언에서 하느님께서 자신을 나환자에게 이끄셨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나환자에게 자선을 베푼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렇게 하도록 이끄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프란치스코는 자기 안에 이미 자리한 역겨움이 있었지만, 그 가운데 하느님의 이끄심에 응답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하느님께서 그에게 작용하여 자신의 역겨움을 감미로움으로 바꾸어주심을 경험한 것이었습니다.
이 회개 여정은 프란치스코가 용을 써서 이웃을 사랑한 것도 하느님을 사랑한 것도 아닙니다. 먼저 계신 하느님, 하느님의 이끄심에 의지하여 그 길을 따랐을 따름입니다. 그러하기에 이 이웃 사랑 안에서 프란치스코는 자기가 고갈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을 향하는 힘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안의 계신 하느님, 나환자 안에 계신 하느님, 자신의 응답으로 더 분명해지는 하느님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이 여정에서 자기가 누구인지 알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프란치스코는 이 여정에서 자기 개인의 고유성을 발견하기보다는 자기 안의 계신 하느님과 하느님 안에 있는 자기를 만났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보다 더 정확하게 하느님과 하나됨이 만들어내는 진미(珍味)를 맛보았고, 하느님 안에서 자기와 이웃이 살아남을 경험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이 여정이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 자기 사랑이 하나로 통합되는 과정이 아닐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