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마또레 평화기도 다락방 말씀기도
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촉진자',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2024년 1월 11일 목요일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러자 바로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곧 돌려보내시며 단단히 이르셨다.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루카 1,42-44)
침묵의 유익함
예수님께서는 이 기적을 행하시면서 침묵을 요구하셨지만, 침묵 속에 오래 감추어지지는 못했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도 이런 일이 벌어지곤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계명과 모범을 따르면서 자신이 맡고 있는 활동이 알려지지 않기를 바라지만, 다른 이들의 유익을 위해 그의 뜻과는 반대로 그 활동이 섭리 안에서 알려지기도 합니다.
-존자 베다-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1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의 말씀이다
창조의 또 다른 긴장은 하느님을 드러내는 것과 드러내지 않는 것 사이의 긴장이다.
“모든 피조물이 자신들의 행위로 하느님을 드러내려고 합니다. 그러니 할 수 있는 한, 그들이 가까이 와서 모든 것을 말하게 하십시오. 하지만 그들은 하느님을 드러내지는 못합니다. 하느님 드러내기를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하느님을 드러내는 것이 그들에게 기쁨이 되든 고통이 되든 간에, 그들은 모두 하느님을 드러내려고 하지만, 하느님은 말로 표현되지 않은 채 머무르십니다.”
피조물은 하느님을 드러내려고 애쓰지만 결국에는 그 과제를 달성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신적 본성의 밝음은 형언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말씀이되 표현되지 않은 말씀이다. 말씀은 신적 침묵, 신적 신비를 어느 정도 가지고 있다. 이 침묵이 피조물에게 고통을 주기도 하고,기쁨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존재한다. 가장 충만한 계시의 순간에도 침묵은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조계는 낙담하거나 포기하거나 헛되이 움직이는 법이 없다. 실로 창조계는 기꺼이 신적인 것을 표현하기 위해 애쓴다.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을 드러내기 위해 기꺼이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피조물이 자신들의 근원, 지신들의 가장 내밀한 터인 하느님과의 접촉을 잃어버리는 것은 아니다. 피조물은 하느님으로부터 흘러 나가지만 되돌아가려고 애쓰기도 한다. 피조물은 자신의 신적 근원의 따스함과 포근함을 그리워한다. 피조물은 자신의 창조의 원천인 창조의 영을 향해 나아간다.(99)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다락방 1월 1주간
<금주간 성서읽기> 1.2.3요한 / 요한 1-4장
<생태 돌봄 주간> 자신. 이웃. 동물과 식물. 자연환경
목요일 성모님의 날
<파티마의 성모 마리아와 목동 / 세 바르따스>
제 4장 오직 고통뿐
양심의 의혹
며칠이 지난 후 싼타렘에서 한 분의 사제가 방문하여 트레스 노와스의 신부처럼 무례하고 사정 없는 질문을 하고 루치아의 대답에 조소를 퍼부었다. 그 때문에 소녀의 마음이 몹시 상했으며 낙담할 지경이었다. 왜냐하면 자신이 가장 존경한 사제가 여러 번에 걸친 발현을 믿지 않는데 자기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시골뜨기가 의심을 품지 않다니 ...... 의심이 생기는 것이 당연한데 하고 자포자기에 빠지려 했다.
다행히도 오리왈의 친절한 본당 신부께 그 마음의 쓰라림을 털어놓을 수 있어서 상처는 아물었다. 그 신부는 비밀을 잘 지키도록 소녀에게 힘을 주었고 그 방법도 가르쳐 주었으며 다른 두 아이에게도 같은 것을 가르쳤고 힘을 북돋아 주었다. 그러나 사정 없는 사람들을 언제까지 참아나가야 하는지 한계를 짐작할 수는 없었다.
어느 날 그들에게 진상을 전부 자백시키고 싶어서 사람의 마음 구석구석까지를 다 꿰뚫어보는 힘을 가진 성인 신부가 오신다는 소문을 퍼뜨린 사람이 있었다. 그 신부는 아이들의 거짓말이나 숨기고 있는 것도 틀림없이 다 알아낸다는 것이었다.
이 소문을 들은 세 아이는 겁을 내기는 커녕 오히려 안심하였다. 히야친따는 무척 좋아날뛰면서, “사람의 마음을 다 보시는 신부님은 언제 오시지? 그분이 마음을 읽을 수 있다면 우리가 참말을 하고 있다는 것도 꼭 알아 주실 거야” 하고 몇 번이나 말했다.(1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