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마또레 평화기도 다락방 말씀기도
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촉진자',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2024년 1월 12일 금요일
교부들의 말씀 묵상
군중 때문에 그분께 가까이 데려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분께서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 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달아 내려보냈다.(마르 2,4)
기도의 장애물
그들은 그리스도께 중풍 병자를 데려가고자 했지만, 사방에서 밀어 대는 군중 때문에 가로막혀 버렸습니다 이러한 일은 영혼에도 종종 일어납니다. 육적 게으름으로 늘어져 벼린 다음, 천상 은총의 약으로 새로워지고 싶어 해도 묵은 습관이라는 걸림돌 때문에 회복이 더딥니다. 영혼이 달콤한 기도에 빠져 주님과 달콤한 속삭임을 나누는 동안에도, 종종 세상의 상념들이 군중처럼 몰려와 영의 눈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일을 방해합니다 그러면 이러한 분심(分心)이 들 때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군중이 아우성치고 있는 바깥으로 나가거나 아래로 내려가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가르치고 계시는 집의 지붕 위로 올라가야 합니다 곧, 성경의 높이에 다다르도록 애써야 하고, 시편 저지와 함께 밤낮으로 주님의 법을 묵상해야 합니다.
-존자 베다-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1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의 말씀이다
“만물을 창조하고 계신 하느님은 그들을 창조하신다는 이유로 그들을 가르치시고, 그들에게 명령을 내리시고, 충고하십니다. 하느님은 만물에게 자신을 따르고, 자신의 말에 순종하라고 명령합니다. ‘강물은 나온 곳으로 되돌아간다'(1,7)고 한 코헬렛의 말씀대로. 하느님은 만물에게 그들의 근원인 자신에게로 서둘러 오라고 명하십니다. 피조물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자연스러운 경향을 가지고, 하느님이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보다 하느님을 더 사랑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 모든 피조물은 자신의 끝을 추구함과 동시에 자신의 근원을 추구합니다.”
흘러 나옴은 흘러 되돌아감, 곧 귀환이기도 하다. 나옴은 들어감이고, 들어감은 나옴이다. 끝과 시작은 하느님 안에서만 일치한다. 말과 일, 말하기와 창조하기, 피조물과 새로운 피조물도 하느님 안에서만 일치한다. 우리와 같은 피조물을 위하여 변증법적인 여정은 계속되어야만 한다. 그 여정은 성령 안에서의 삶을 구성한다.
만물은 흘러 나옴과 되돌아감에 몰두한다. 흘러 나옴과 되돌아감이 일어나는 것은, “만물이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만물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가운데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고 하느님처럼 되려고 노력한다. 우리는 모든 자연이 하느님을 추구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모든 피조물은 본디부터 하나의 목적을 위해 곧 하느님처럼 되기 위해 흘러 나와 움직이고 있습니다. 하늘이 운행하는 것은, 그것이 하느님을 구하거나 하느님처럼 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만물 속에 계시지 않는다면, 자연은 만물 속에서 무언가를 이룰 수도 갈망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바라든 바라지 않든 간에, 여러분이 알고 있든 그렇지 않든 간에, 자연은 자체적으로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을 얻으려고 노력합니다.”(100)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다락방 1월 1주간
<금주간 성서읽기> 1.2.3요한 / 요한 1-4장
<생태 돌봄 주간> 자신. 이웃. 동물과 식물. 자연환경
금요일 성인의 날
영적 삶의 샘(디다케에서 아우구스티노까지), 요한 봐이스마이어 외 지음
암브로시오
직무 수행자의 의무에 대하여
다윗이 이렇게 말만 했습니까? 자신이 한 이 말을 지켜 나가지 않았습니까? 그는 자신이 말한 대로 지켜 나갔습니다. 그는 시므이가 자신을 죄인으로 고발히는데도 침묵을 지켰습니다. 그는 군인들로 둘러싸여 있었지만 비난하지도 않았고 복수하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스루야의 아들이 복수를 하려고 나섰지만 그는 허락하지 않았습니다(2사무 16,5 이하) . 그는 입을 다물고 겸손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살인자' 라고 부르는데도 그는 흥분하지 않고 온유하게 머물렀습니다. 그는 지신이 한 좋은 일들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비난들에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모욕을 받을 때 즉시 흥분하는 사람은 그런 모욕을 받을 만한 사람이란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 비난들이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음을 알려주려고 하는 그 노력이 오히려 그런 모욕을 받을 만하다는 인상을 불러일으킵니다. 자신에 대한 모욕들에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이 그것들로 화를 내는 것보다 훨씬 더 낫습니다. 모욕에 반응을 보이지 않는 사람은 그 모욕을 무시해 버리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것들 때문에 화를 내는 사람은 그것들을 강하게 느끼기 때문에 고통을 받습니다.(1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