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독서에서 사무엘에게 이렇게 얘기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번제물이나 희생 제물 바치는 것을 주님께서 더 좋아하실 것 같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단식에 대한 새로운 가르침을 주시는데
사무엘 어법대로 바꿔 얘기하면 이런 말이 되지 않을까 저는 한번 생각해봤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단식하는 것을 주님께서 더 좋아하실 것 같습니까?”
또는 이렇게도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주님 말씀대로 사랑을 실천하는 것보다
요한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처럼 단식하는 것을 주님께서 더 좋아하실 것 같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과 달리 신앙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주님께서 더 좋아하실 것이 무엇인지 늘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하며 살거나
기껏해야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 좋아할 것을 하며 삽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하며 사는 것은 자기애 곧 자기 사랑이고,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 좋아할 것을 하며 사는 것은 이웃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랑은 하느님 사랑이 아니고,
아직 하느님 사랑에 미치지 못한 사랑이기에
아직 완전하지도 완성되지도 못한 사랑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사랑하여 하느님께서 좋아하실 것을 하면
자기 사랑과 이웃 사랑을 모두 완성하게 하기에 완전한 사랑입니다.
우선 ‘하느님께서 좋아하실 자기 사랑’을 합니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자기 사랑이 자기밖에 사랑치 못하는 것과 달리
자중자애 곧 자신을 진정 소중히 여기고 제대로 사랑하게 할 것입니다.
오늘 사무엘기를 보면 자신을 하찮게 여기고 구차한 짓을 한 사울을
사무엘이 이렇게 나무랍니다.
"임금님은 자신을 하찮은 사람으로 여기실지 몰라도,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아니십니까?
주님께서 임금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이스라엘 위에 임금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이는 즉시 어제 2독서였던 코린토 1서의 바오로 사도 말을 떠오르게 합니다.
"여러분의 몸이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의 성전임을 모릅니까?"
성령의 성전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자기 사랑이고,
나를 진정 자중자애하는 사랑이고 완전한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이웃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이웃 사랑은 진정한 이웃 사랑이 아니기 십상이고,
그래서 자기를 진정 사랑하게 하거나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기 십상이지요.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잃게 될까 봐 전전긍긍하며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하는 것이고,
다른 사람이 좋아하나 어쩌나 눈치나 보는 사랑이기 십상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이웃 사랑은 당당합니다.
나도 성령의 성전이요 너도 성령의 성전으로 사랑하고,
이웃이 좋아할 일이 아니라 이웃이 행복할 일을 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좋아하실 일은, 기실 하느님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여 너와 내가 모두 행복할 일을 하느님 안에서 하는 것인데
오늘 우리는 이런 확신을 가지고 그리고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 마음으로
새 출발을 해야겠습니다.
뜻하지 않게 많은 분을 염려케 해드렸습니다.
강론이 올라오지 않아 많은 분이 저 때문에 걱정하셨는데
아파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인터넷이 안 되어 강론을 올리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어쨌거나 걱정을 끼쳤음에 죄송하고,
문자 주셨는데 일일이 답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오늘부터 꼬박꼬박 강론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