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꽃피는 아몬드 나무 (Almond Blossoms)(1890)
작가 :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
크기 : 74 X 92cm
소재지 : 네렐란드 암스텔담 반 고흐 미술관
성미술의 초기에 있어 성미술의 대상은 전적으로 성서와 교회사에 나타나고 있는 신앙적 주제와 사건들이 대종이었다.
교회가 시작된 초기 박해 시대에는 교회의 상징인 포도나무나 순교의 상징인 종려 가지와 신앙표현에 관계되는 모노그램과 같이 단순한 것으로 신앙을 표현했다.
중세기에 와서 상징적 의미가 발달되면서 백합은 순결, 석류는 그 붉은 열매로 수난의 상징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후 세월이 흐르면서 성화의 배경으로 풍경이 등장하기도 했고 어떤 때 여기에 나무나 동물들을 등장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내용을 설명하기 위한 어떤 도구나 배경에 불과했고 항상 성서의 내용이나 성인들의 삶을 전하는 것이 대종이었다.
그후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는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말로 표현되는 교훈을 담고 있는 형식이 회화로 표현되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교 이전 로마 제국에서 사용되던 것을 신앙으로 승하시킨 것이었다.
고대 로마 공화정 시절의 개선식에서 유래했다고 전하는 이 풍속은 승리했다고 해서 너무 우쭐대어선 않된다는 교훈을 주기 위해 승전 개선식에서 사용하던 예식을 신앙으로 승화시켜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신앙의 내용을 그림으로 표현하는데 대단히 어색하던 개신교 신자들에게 이 방법은 대단히 매력적인 것이 되어 거의 성화의 유일한 방법처럼 사용되기도 했다.
우상숭배란 잘못된 생각에 의해 표현에 거부감을 느끼던 화란 계통의 개신교도들은 정물화의 성격을 띈 꽂이나 고급 물건을 등장시켜 너무 우쭐대는 인생이나 현세의 유혹에 빠져선 안된다는 교훈적인 내용을 전하기 위해 이런 것들이 사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성미술의 폭은 더 확장되었다. 성서에 등장하는 사건이나 인물의 묘사만이 아닌 하느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 모든 만물은 다 하느님의 모습을 전하는 것이기에 성미술의 대상이 될 수가 있다는 생각이 확산되기 시작했으며 이것은 중요한 발견으로 볼 수 있다.
창세기에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창세기2:11)는 말씀은 바로 이 세상 만물은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면 다 하느님을 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작가 빈센트 고흐는 하느님이나 예수님의 모습을 그리지 않고 세상에 드러나는 인간 삶의 모습들, 농부들, 죄수들, 우편 배달부, 의사 등 평범한 일상 삶에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을 통해 하느님을 만날 수 있게 만들었다.
교회 역사에서 성인으로 평가 받는 중세기 도미니코 수도자로서 복자로 시복되신 프라 안젤리코가 있고 지난 세기를 산 사람으로서 오늘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성가정 대성당을 설계 건축한 안토니오 가우디가 있다.
가우디는 지금 그의 장한 삶으로 시복 수속에 들어가 있는 처지이다. 그런데 반 코흐는 개신교 신자로서 그의 작품성 때문에 크리스챤 뿐 아니나 많은 선의의 인류에게 그의 작품이 너무도 많은 감동을 주고 있기에 시성되지 않는 성인으로 인정되고 있다.
그의 생애는 너무도 평범하다 못해 성격상 여러 결점으로 오히려 문제아로 평가될 수 있는 그런 인생이었으나 그는 많은 인간적인 약함과 결점 속에서도 하느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 너무도 처절한 노력을 했기에 이점에서 그는 예술을 통해 하느님의 뜻을 전달한 성인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는 간질성 정신질환을 지니고 있었으며 너무도 과격한 성격으로 격정을 이기지 못해 귀를 자를 만큼 보통 인간으로서 대하기 어려운 면이 었는 어떤 의미의 문제아였으나, 그는 이런 문제 가운데서도 하느님의 뜻을 살고 표현하고자 너무 노력을 했기에 그는 삶과 작품을 통해 한 인간이 하느님의 자녀로 진실되게 살고픈 노력한 아름다움에 경건한 감동을 하게 된다.
그는 남의 이목이나 눈치와는 무관한 나름대로 예수의 제자로서의 모습을 보이기 위해 선택한 그의 삶은 그 부모들을 너무도 실망시켰다.
그가 그림 공부를 하면서도 예수의 제자답게 살기 위해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는 자식을 낳아 생계 유지를 위해 창녀로 살고 있는 시엔이란 여인을 혼신의 마음으로 돕기 위해 그와 동거생활을 시작하자 목사인 그의 아버지의 분노는 더 할 수 없이 커지고 많은 이웃들이 그를 복음과는 무관한 이상한 젊은이로 따돌리게 되었다.
그는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예수에 대한 매력 때문에 아버지를 본받아 목사가 되기로 하고 신학 공부를 시작했다.
그의 아버지 목사는 양심적이며 인격적인 목회를 통해 주위 사람들의 존경을 한몸으롤 받던 휼륭한 목회자였기에 그는 자연스럽게 목사의 길이 바로 예수의 제자로서의 삶을 가장 잘 살 수 있는 길임을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목사가 되기로 결심한 후 그가 교회안을 자세히 보게 되면서 교회는 그가 생각하는 것 만큼 순수하게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곳에 아니라 거기에도 역시 인간적인 정치와 예수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먼 위선과 이중성이 정착되어 있는 것을 보고 크게 실망했다.
그래서 그는 예수의 제자가 되기 위해 복음을 살기 위해선 예술가의 길을 택하는 것이 더 좋겠단 생각을 하면서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가족으로부터 부모로부터도 정신적으로 축출당한 처지에서 유일하게 그를 이해한 사람은 그의 동생 테오 였기에 둘은 혈육의 형제라는 관계 이상의 정신적인 도반으로서 의지하면서 더욱이 코흐가 작가 생활에 필요한 경제적인 뒷바라지를 동생 테오가 했다.
이들 생애에서 서로 교환한 편지가 900여 통 되는데 여기서 드러나고 있는 그들의 우정은 눈물 겹도록 아름답기에 고희의 작품 못지않게 이 편지들도 순수한 인간들의 아름다운 우정 표현의 감동적인 작품으로 읽히고 있다.
이런 동생의 도움으로 그는 일생 동안 700여점의 작품을 제작했으나 세상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에 그중에 한점이 겨우 팔릴 만큼 그는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존재로 소외된 삶을 살아야 했다.
그는 이런 악순환을 견디기 너무 힘들어 정신적인 발작을 일으켜 요양 생활에 들어가기도 했다. 그가 격심한 고통으로 생긴 정신적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요양 상태로 온 남쪽 지방은 그의 마음의 안정과 함께 의기소침했던 장애에서 벗어나 삶의 의욕을 주면서 왕성한 활동가의 삶을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여기서 그는 화창한 하늘을 배경으로 봄을 알리는 꽃을 피우고 있는 아몬드, 자두 ,복숭화 같은 꽃들을 그리길 무척 좋아했다. 이것을 통해 그는 자신의 겪고 있는 갈등, 좌절감, 우울증 등을 극복하며 나름대로 밝은 내일을 꿈꿀 수 있는 심리적 치료법으로 생각했다.
이때 그를 유일하게 이해하던 동생 테오가 첫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이 기쁨을 바로 이 작품으로 표현했다.
그는 모처럼 자기 인생에 닥친 순수한 큰 기쁨을 작품을 통해 표현하고자 했다.
그는 화가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이해하고 도와 준 동생 테오가 첫아들을 낳은 것을 축하해주기 위해, 그 방을 장식할 작품을 그린다는 마음으로 기쁨속에서 혼신의 노력을 다해 이 작품을 제작했다.
이것은 그의 작품 중에 유일하게 밝은 색조를 띄면서 그의 마음을 표현했기에 그의 작품 중 유일하게 인생의 그림자나 갈등에서 면제된 작품으로 볼 수 있다.
그가 이 작품을 그려준 조카에 대한 축복은 그후 현실적으로 결실을 맺게 된다.
그러나 이런 행복한 상념도 잠시, 그는 다시 정신적 발작을 일으켜 밀밭에서 권총으로 자기 가슴을 자해해 결국 동생이 지켜보는 가운데 인생을 마치게 되었다.
이 작품은 그의 생애 마지막 해에 그려진 것임을 보면 조카의 탄생으로 그가 누릴 수 있었던 행복도 잠시였음을 알 수 있다.
형을 이해하고 지극정성으로 보살피던 동생 레오는 코흐가 사망 후 6개월 후 다시 형의 뒤를 따르게 된다. 참으로 삶에서도 함께 했던 형제가 죽음으로도 함께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일생 몰이해와 오해 속에서 따돌림받던 그의 처지, 화가로서 혼신의 노력을 다 했으나 생전에 아무도 그를 이해해 주지 않기에 고스란히 남아 있던 그의 작품이 세상으로부터 빛을 받게 되면서 이상한 성격의 광인으로서 그의 면모가 아니라 남의 오해와 질시 속에서도 복음을 살기 위해 노력했던 그의 모습, 창녀를 보고도 불결하다는 생각보다 생계를 위해 몸을 팔아야 하는 그의 처지를 도우고자 했던 그 마음의 순수성을 이해되자 그의 작품과 인생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된다.
그가 이 작품을 그려 출생을 축하해준 조카, 형의 기행으로 많은 고생을 하고 넉넉지 못한 살림에서도 형의 뒷바라지를 위해 긴 세월 생활비를 도와 준 그의 동생 테오는 형의 순수한 마음을 이해했기에 자기 아들의 이름에 빈센트라는 이름을 부쳐 주면서 형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기억하고자 했다.
이 조카는 후에 자기 어머니와 함께 반코흐의 작품을 모아 미술관을 만듦으로 살아 생전에 아무 인정도 받지 못했던 삼촌 반코흐를 세상에 알리는 대단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작가는 생전 700 여점을 작품을 제작했으나 고작 한점이 팔릴 만큼 철저히 세상으로 부터외면 당했으나, 이 작품을 그의 재수와 이 작품을 그려 선물한 조카 윌헤름 빈센트에 의해 세상에 빛을 보게 되면서 작가의 작품은 전혀 다른 주목을 받게 된다.
우리 말에 전화위복이라는 말이 있는데 작가의 작품이 팔리지 않았던 안타까움이 오히려 작품을 모아 미술관을 만드는데 극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 작품의 과정과 역사를 이해하고 나면 성서의 구절들이 절로 마음에 와닿게 된다.
”눈물로 씨뿌리던 사람들이 기쁨으로 곡식을 거두오리다.
뿌릴 씨를 가지고 울며 가던 그들은 곡식단 들고 올 제 춤추며 돌아오리이다“
(시편 126:5-6)
순수한 인간의 열정은 언젠가 빛을 보게 된다는 희망의 확신이다. 이것이 그의 생전에가 아니드라도 하느님이 원하시는 시기에 그분이 원하는 방법대로 빛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그의 작품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그의 이해받지 못햇던 순수한 삶의 모습, 어떤 제도적 종교에서 보기 힘든 맑은 삶이 모습이 드러나면서 그는 광인의 삶이 아니라 오늘도 대단한 감동을 줄 수 있는 성인의 모습을 재현하게 되었으며 교회가 보여주는 성인의 모습 보다 훨씬 더 폭넓은 인간적 모습의 성인상을 제시하고 있다.
작가는 위선과 형식으로 찌들린 목사의 길을 떠나 화가로 옮기게 된 것은 프랑스의 신학자 르낭(Ernest Renan)이 쓴” 예수의 생애“라는 작품에 큰 영향을 받았다.
르낭은 카톨릭 성직자가 되기 위해 신학교 생활을 하면서 교회가 가르치는 예수에 대해 회의하고 신학교를 뗘나 개인적으로 연구하면서 저술한 것이 바로 예수의 전기로서 이 책을 반고흐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르낭은 참된 종교는 형식이나 법의 틀에 갇힌 것이 아니라 순결한 마음에 있음을 강조하면서 종교가 제도화 되면서 어쩔 수 없이 생기기 마련인 여러 폐습들을 다 털어버려야 예수의 진면모가 드러난다고 했다.
머리나 입으로서가 아닌 가슴으로 실천하는 종교를 예수 가르침의 핵심으로 여기면서 가슴에서 울어나지 않는 모든 종교를 멸시하였는데 작가도 여기에 전적으로 동감하면서 예술의 통해 그는 이런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었을 때 로마의 백부장이 고백한 이 예수의 모습이 작가의 삶과 작품 안에서 드러나게 되었다
”이 사람이 정녕 하느님의 아들이구나“ (마르코 15: 39)
뭣보다 크리스챤 인간상은 결코 완벽한 모습이 아닌 어떤 때 상처받고 병든 가운에서도 작가처럼 외골수로 하느님의 뜻을 찾고자 하는 사람을 통해 드러난다는 것을 이 작품은 우리에게 보이고 있다.
아몬드 꽃은 풍요와 다산의 상징으로 작품에서 경쾌하고 밝은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처럼 인간 삶의 밝은 면과 긍정성을 힘있게 선포하고 있다.
작가는 인간적인 면으로 볼 때 결점도 많고 여러 기행으로 주위 사람들을 혼란에 빠지게 만들기도 했으나 그의 가슴은 복음에 나타난 예수의 모습으로 각인되어 있었기에 어떤 정상적이나 탁월한 능력을 가진 사람도 보이지 못했던 예수의 모습을 보일 수 있었고 그러기에 그는 종교를 초월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의 모습을 통해 성인으로 추앙되고 있다.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 엄청난 힘은 하느님의 것으로, 우리에게서 나오는 힘이 아님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
( 코린트 2서 4: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