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
오늘 주님께서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가운데 세웁니다.
사람들 가운데 중심인물 곧 주인공이 되게 하시는 겁니다.
한 번도 이렇게 중심에 서 본 적 없는 그로서는 얼떨떨하기만 할 것입니다.
그런 그와 주님을 못마땅한 눈으로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들은 한 번도 이런 장애인을 중심에 세운 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늘 자기가 중심이고 이런 사람들을 가장자리로 몰아낸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장애의 고통이 얼마나 클지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을 겁니다.
자주, 아니, 한 번만이라도 그 고통을 생각해 본 적이 있다면
장애인들의 수십 년 고통에 이렇게 매몰차고 가혹하지 않았을 것이고,
고쳐주시는 주님을 안식일을 운운하며 죽이려고 들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저는 생각해 봅니다.
이들은 안식일이 아니라 평일에도 장애인들의 고통에 관심이 없었을 것이고,
주님께서 안식일이 아닌 평일에 고쳐주셨어도
잘하신 것이라고 주님을 칭송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웃의 고통과 불편을 보지 못하는 사랑 장애를 이들은 가지고 있는 겁니다.
제 생각에 이 사랑 장애가 육신의 장애보다 훨씬 불행한 장애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런 그들에 대해 분노하시면서도 다른 한편 슬퍼하십니다.
“그분께서는 노기를 띠시고 그들을 둘러보셨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셨다.”
저도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자주 분노하거나 가여워할 때가 있습니다.
젊은이들이 노약자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거나 오히려 먼저 자리를 차지할 때,
다른 이의 통행을 불편하게 하면서도 그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게 될 때
어떤 때는 분노하고 어떤 때는 그들의 영적 장애와 사랑 장애에 가여워합니다.
저의 사랑이 부족할 때는 분노만 하고,
저의 사랑이 차올라있는 상태일 때는 그들의 미래 불행을 내다보며 가여워합니다.
그렇게 사랑할 줄 모르고 배려할 줄 모르는 사람의 미래가 뻔히 보입니다.
불행해지라고 제가 저주하진 않지만 불행해지는 그들을 저는 보게 됩니다.
그러다가 이내 저 자신을 들여다봅니다.
밖 곧 남을 보다가 안 곧 나를 보는 것이지요
나는 내 가운데 그들을 세우고 있는가?
그들의 고통이 내 안에 있는가?
그들이 저의 중심에 있지 않고 제가 저의 중심에 있지요.
흔히 하는 말로 자기중심적인 저이지요.
그러니 주님처럼 그들을 공동체 한가운데 세우지도 않습니다.
공동체 가장자리에 있는데도 가운데 세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랑 장애를 저와 우리 공동체 안에서 보고
슬퍼하며 반성하는 오늘 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