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십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시선은 곱지 않습니다.
복음 사가는
그들이 예수님을 고발할 마음이 있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치유하는 일은
좋은 일이며
그의 목숨을 구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좋은 일은 안식일에도 할 수 있기를
원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그들 마음이 불편했을까요?
예수님의 치유가 안식일 법을 어기는 것이라고
그들은 말하지 못합니다.
복음 사가는
그들이 예수님의 질문에 입을 열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여러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그 가운데 하나는
눈치라고 생각합니다.
옆 사람의 시선이 신경 쓰여서
각자는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없습니다.
병자가 나의 가족이라면
치유를 청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도 편하지만은 않았을 것입니다.
치유를 청하는 것은 예수님의 뜻에 동의하는 것이고
그렇게 함께 안식일 법을 어기는 것이 되어
공동체에서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치유가 법적으로 타당한지 아닌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결국 나에게 피해가 오는지 아닌지가 중요합니다.
어떻게 말해도 손해가 올 것처럼 느껴지기에
입을 다무는 것을 선택합니다.
치유를 반대한다고 해도
예수님의 논리와 싸우기에는
자신들의 말에 힘이 없습니다.
치유는 좋은 것인데
안식일이라고 해서 반대를 할 뚜렷한 이유를
찾지 못합니다.
예수님과 대화하면서 길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자칫 이야기를 잘못 꺼냈다가
자신들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결정될 것 같아서
그리고 그 책임을 자신들이 져야 할 것 같아서
아예 말을 꺼내지 않습니다.
대화가 정말 쉽지 않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드러낼 수 없고
자신이 원하는 결과로만 가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대화는 더 쉽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사실도 필요 없고
원칙도 무시됩니다.
내 이익만
내가 편안한지만 중요합니다.
그렇게 될수록 세상은 각박해지고
차가워집니다.
남을 위해서 나를 희생하지 않습니다.
남을 위해서 내 이익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내 이익만 추구하는 삶은
당장의 눈 앞의 이익 때문에
사실을 이야기 하지 않는 마음은
결국 나에게도 불이익으로 돌아옵니다.
물론 물질적으로 풍요로울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삶이 행복한 삶인지
내가 그토록 원하는 삶인지
돌아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